세계일보

검색

'역사저널 그날', 공민왕과 기황후의 대립 '승자는?'

입력 : 2016-10-23 19:47:50 수정 : 2016-10-23 19:47:49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사진=KBS 제공

고려 마지막 개혁군주 공민왕과 원나라를 휘어잡은 여인 기황후의 이야기가 안방극장을 찾는다.

23일 오후 9시 40분에 방송되는 KBS1 '역사저널 그날'은 '기황후, 공민왕을 세우다'로 꾸며진다. 고려의 마지막 등불이자 개혁 군주로 알려진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여인. 고려 여인 최초로 원나라의 황후가 된 인물 기황후였다. 공민왕과 기황후는 고려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끼친 것일까?

왕위 경쟁에서 두 번이나 조카들에게 밀린 공민왕은 1351년, 마침내 왕위에 오른다. 그런데 공민왕이 왕위에 오른 데는 기황후의 결정적 역할이 있었다. 기황후는 고려 공녀 출신으로 원나라 순제의 마음을 사로잡아 황후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로 고려와 원나라를 좌지우지하던 그가 어린 충정왕을 폐위하고 공민왕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기황후는 공민왕을 왕위에 올리고 그의 충성을 바랐다. 하지만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각종 개혁을 추진하고, 반원(反元) 행보를 걷는다. 그리고 즉위 바로 다음 해, 결정적 사건이 터진다. 공민왕의 최측근 조일신이 난을 일으킨 것이다.
 
조일신의 난은 기황후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운 부원 세력을 숙청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고려 정계에 널리 퍼져있었던 친(親) 기황후 세력. 결국 공민왕은 자신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조일신을 처단하고 일을 마무리지었다.

조일신의 난을 계기로 일련의 개혁을 중단한 공민왕은 기황후와 부원 세력의 눈치를 보며 반원(反元) 운동을 멈추고 납작 엎드리게 된다. 부원 세력의 힘은 기황후의 아들이 황태자로 책봉되면서 더 강성해진다. 기씨 일족은 원나라와 기황후의 권세만 믿고 왕 위에 군림하려 했다.

그런데 1356년 5월 18일. 고려와 원나라의 관계를 완전히 뒤집는 사건이 벌어진다. 공민왕이 기철을 시작으로 기황후 세력을 일제히 숙청한 것이다. 이어 부원 세력의 근거지인 '정동행중서성 이문소'를 폐지하고,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쌍성총관부'를 수복하기 위해 군대까지 출정시켰다.

공민왕의 반격은 단 하루만에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원나라의 연호까지 금지하고 쌍성총관부를 되찾은 고려는, 98년간 이어진 원나라의 간섭을 끊어내는 데 성공한다.

공민왕은 기황후와 부원 세력을 상대로 승기를 잡았다.  그런데 그가 흥왕사에 머무르던 중, 공민왕의 목숨을 노린 50여 명의 자객이 들이닥친다. 한밤중에 벌어진 공민왕 암살 시도. 대체 누가 공민왕을 죽이려 한 것일까?

게다가 원에서 들려온 믿을 수 없는 소식이 들려왔다. 원나라가 공민왕의 작은아버지인 덕흥군을 고려 국왕으로 세우고, 공민왕 폐위를 결정한 것이다. 심지어 기황후의 일족인 기삼보노를 덕흥군의 양자로 삼았다. 기황후는 공민왕을 꺾고 자신의 일족을 왕으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자신의 가족들을 죽인 공민왕에 대한 기황후의 복수가 시작된 것일까? 결국 덕흥군은 원나라 1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한다. 기황후와 공민왕, 최후의 대결. 과연 승리의 여신은 누구에게 미소 지을 것인가? 


이슈팀 ent1@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한지민 '우아하게'
  • 한지민 '우아하게'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최지우 '여신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