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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여 년간 개발이 멈춘 곳. 공장 굴뚝과 자동차 경적 등으로 대변되는 개발의 흔적을 찾기 힘든 곳이다. 드넓게 펼쳐진 평야만이 인간의 손길이 닿는 곳임을 알린다.
강원도 철원 민간인 통제구역. 한국전쟁 이후 허가받은 이들만 접근이 가능한 곳이다. 가을철 추수로 한창 붐볐을 들판은 주인 없는 땅처럼 휑해졌다. 그나마 추수가 끝나자 사람의 발길마저 끊겼다. 인적이 끊어진 이곳에 새로운 주인이 나타났다. 가을이 끝날 무렵부터 서서히 날아든 철새들이 자리를 잡았다. 인간에겐 몸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쌀쌀한 날씨이지만 시베리아의 찬 바람을 피해 온 이들에겐 오히려 포근하게 느껴지는 듯싶다. 이맘때 철원평야는 철새들이 겨울을 보낼 낙원으로 탈바꿈한다. 추수 후 논에 낙곡들이 있고, 전쟁이 끝난 후 사람의 접근이 힘들어지자 철새들에겐 천국이 돼버린 것이다.
강원 철원 민통선 지역의 철새들. |
평화전망대로 가는 길에선 차의 속도를 줄이자. 주변으로 펼쳐진 들판을 봐야 한다. 차도 옆 논에 쇠기러기, 두루미, 재두루미, 독수리 등이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중 눈에 띄는 철새는 단연 두루미다. ‘학’으로 더 친숙한 흰 두루미가 날개를 퍼덕이며 학춤을 추는 모습을 지근거리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차에서 내리는 순간 이 모습은 사라져버린다. 근처에 차를 멈추기만 해도 고개를 세운다. 좀더 자세히 보겠다고 차 문을 열고 내리는 순간 이들은 땅을 박차고 날아간다.
서울에서 북한 원산을 잇던 경원선 남측 최북단 역인 월정리역. |
민통선 안까지 와서 철새만 보고 돌아가긴 아쉽다. 평화전망대에 도착하면 바로 앞이 비무장지대(DMZ)다. 궁예가 세운 태봉국의 도성 터가 바로 비무장지대의 너른 평야지대다. 서울에서 북한 원산을 잇던 경원선 남측 최북단 역인 월정리역도 있다.
월정리역 뒤편에 있는 전쟁 통에 탈선한 열차의 잔해. |
해방 후 북한이 러시아 건축 방식으로 지은 노동당사. |
민통선을 나오면 노동당사가 여행객을 맞는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발해를 꿈꾸며’ 뮤직비디오에 나온 그 곳이다. 해방 후 북한 노동당이 사용하던 건물로, 러시아식 건축법으로 지어졌다. 정문 앞 계단을 보면 파인 곳이 보인다. 국군과 UN군이 수복 후 탱크로 계단을 올라간 뒤 노동당사 정문을 포격했다. 노동당사 뒤편을 보면 뻥 뚫려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민통선 안에서만 철새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철새하면 떠오르는 군무를 보려면 토교저수지로 가면 된다. 토교저수지는 민통선 안에 속하는 곳이지만, 제방 있는 곳에서는 검문소를 통과하지 않고 쇠기러기의 군무를 볼 수 있다. 대신 부지런해야한다. 동트기 전 이곳에 도착해야 수만마리의 쇠기러기가 날아가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장시간 추위에 버틸 수 있도록 옷도 단단히 입어야하고, 쌍안경을 준비하면 좋다.
강원 철원 토교저수지는 수만마리의 쇠기러기가 펼치는 군무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동이 터 주위가 밝아오면 운무 사이로 물 위에 앉아있는 쇠기러기 무리를 볼 수 있다. ‘꽥꽥’ 거리는 소리와 함께 쇠기러기 수천 수만마리가 머리 위를 지나가는 장관을 연출한다. |
오전 7시쯤 저수지에 도착하면 저수지 위로 운무가 솟아오른다. 아직 주위가 어두워 얼마나 새들이 있는지 보이지 않지만 ‘꽥꽥’ 소리가 들려온다. 슬슬 동이 트기 시작하면 대열을 지은 수십마리의 철새들이 하늘을 날기 시작한다. 이것을 보고 감탄하기엔 아직 이르다. 주위가 밝아오면 수면 위에 거뭇거뭇한 곳이 보이기 시작한다. 쇠기러기 무리다. 잠에서 깼는지 ‘꽥꽥’ 거리는 소리도 커진다. 이 무리들이 머리 위로 날아간다. 언뜻 봐도 수천 수만마리가 머리 위를 지나간다. 한 차례가 아니다. 수시로 군무를 펼치는 장관을 연출한다. 쇠기러기 무리 중 일부는 저수지로 돌아온다. 무리 중 일행이 뒤쳐졌을 때 그들을 데리고 가기 위해서다.
철원 철새도래지 관찰소에서는 한탄강에서 쉬고 있는 두루미들을 볼 수 있다. |
철원=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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