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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1960년대나 지금이나 친구 얻는 방법 모른다"

입력 : 2016-12-06 16:57:15 수정 : 2016-12-06 16:5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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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중국의 강력한 반대에도 몽골을 방문, 환영객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1962년 12월 당시 중국 외교부장 저우언라이(周恩來)는 국경조약 체결과 경제원조 요청을 위해 중국을 찾은 몽골 총리 윰자긴 체덴발에게 의제에 없던 중국-인도 전쟁을 거론하면서 인도가 미 제국주의에 팔려가 반중국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체덴발이 맞장구를 치는 대신 뜨뜻미지근하게 중·인 분쟁에 유감을 표시하는 선에 그치자, 저우언라이는 "유감이라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압박했다. 중국이 옳고 인도는 그르다는 답이 정해진 문제에 중립은 있을 수 없다고 윽박지른 셈이다.

체덴발은 물러서지 않고 히말라야 산맥의 사람도 살지 않는 땅 쪼가리를 놓고 인도와 싸우는 것은 인도를 서방 쪽에 붙도록 몰고 감으로써 중국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저우언라이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다"고 최근 몽골 외교부가 비밀해제해 온라인에 공개한 당시 회담록은 전하고 있다.

외교·안보 전문매체 포린 폴리시는 5일(현지시간) 두 사람 간 회담 분위기는 이후 싸늘하게 식었고, 체덴발이 중국 노동자들을 몽골에 더 많이 파견해 달라고 요청한 데 대해 저우언라이는 중·인 갈등에서 중국 입장에 대한 지지와 이 문제를 연계시켰다.

두 사람의 언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저우언라이에게 체덴발이 "그렇게 화낼 필요는 없지 않느냐. 차분하게 얘기하자"고 하자 저우언라이가 지금 나를 "훈계"하는 것이냐고 발끈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주먹 다짐이라도 벌어질 것 같았다"는 게 당시 배석했던 중국주재 몽골대사의 관전평이었다.

이 회담 후 양측 관계는 악화해 중국은 몽골에 대한 경제원조를 제한했고 2년 뒤엔 중국 노동자들을 몽골에서 철수했다. 이에 몽골은 소련에 보호를 요청, 소련군이 1991년 소련의 붕괴 때까지 몽골에 주둔하게 됐다.

1962년 중·인 국경 분쟁은 중국이 시짱 자치구로 편입시킨 티베트에서 1959년 반중국 반란이 일어난 후, 인도가 당시 23세인 달라이 라마의 망명을 받아들인 게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였다. 당시까지 공존의 모범 사례로 꼽히던 양국 관계는 급속히 긴장이 높아져 결국 중국의 선공으로 무력충돌이 빚어졌다.

포린 폴리시는 "비록 중국이 전투에서 이겼지만 정말 중요한 문제는 국제사회에서 인도가 나쁜 놈들이라는 것을 인정받는 것이었기에 저우언라이는 이에 외교력을 집중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지난달에도 중국은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의 몽골 방문을 앞두고 "반중국 분리주의자"인 달라이 라마의 방문 계획을 취소할 것을 몽골에 "강력 요구"하면서 응하지 않으면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몽골이 거부하자 중국은 실제로 양국 정부 간 회담을 무기 연기한 데 이어 지난 2일엔 국경을 통과하는 화물 차량마다 통관비를 징수하는 등 경제적 보복 조치를 이어가고 있다.

몽골이 중국으로부터 기대해온, 원리금 상환 부담이 가벼운 연성차관과 경제원조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포린 폴리시는 중국이 자국의 부상은 이웃 국가들과 공동으로 이기는 길이라고 묘사하고, 자신들의 외교정책은 과거 강대국들과 달리 국가 간 평등과 불간섭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고 선전하고 있으나, "몽골이 자신들의 정치적 요구에 굴복토록 강압하는 것은 중국이 말하는 우의의 사악한 면을 드러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매체는 "중국과 몽골 관계사는 노골적인 압박과 협박이 (중국이) 예기치 않는 방향으로 역풍을 불러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저우언라이가 중국의 도움을 기대하며 자국을 방문한 몽골의 지도자에게 무리하게 중국의 관점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한 것은 그의 기대와 반대 효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즉, 1960년대 초 몽골 지도부 가운데 일부는 대중 협력노선을 주창했으나, 중국의 강압으로 인해 대중 관계 개선론은 몽골 국내에서 정치적으로 살아남을 수가 없게 됐다. 중국의 대리인, 매국노로 낙인찍힐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당시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반대 의견을 용납할 줄 모르는 데 있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국내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분쇄하던 잣대를 국제사회에도 적용, 내 편이 아니면 반대편이며 신중한 중립이 설 수 있는 중간지대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포린 폴리시는 상기했다. 겉으로는 평등과 불간섭을 내세우지만 한 꺼풀만 벗기면 자신들의 요구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 경우 분노와 보복을 가하는 행태였다는 것이다.

포린폴리시는 오늘날 중국은 1960년대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힘이 커졌지만 "타국, 특히 중국의 의도에 의심을 가진 이웃 국가들을 윽박질러 굴종시키는 게 친구를 얻는 유용한 방법이 아니라는 깨달음은 그때에 비해 나아진 게 없다"고 비판했다.

최근 달라이 라마의 몽골 방문 논란 때도 몽골 국회 부의장이 용(중국)을 건드리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고 공개 발언했으나, 1960년대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고압적인 위협으로 인해 중국과 우호 관계를 맺자는 주장의 정치적 입지는 도리어 약화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매체는 "중국이 역내 국가들로부터 신뢰를 얻으려면, 평등에 관한 자신들의 말이 말뿐이 아님을 인식시키고, 타국이 다른 견해를 가질 권리를 인정하며 "강력한 요구"나 분노에 찬 경제 지렛대로 순종을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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