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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고 미워하고 잊히고… 나선형으로 반복되는 운명

입력 : 2016-12-08 20:49:42 수정 : 2016-12-08 20:4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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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길연 장편 ‘달리는 남자 걷는 여자’ “생은 반복된다. 첫날인 듯 처음인 듯 단 한 번뿐인 듯 우리를 현혹하지만 어쩌랴. 생은 돌고 돌고 돈다. 시계방향이든 그 반대방향이든 멈춰 서지 않는다. 어느 날 모래를 채운 샌드백처럼 삶이 무거워져서 제자리에 오뚝 멈춰 설 수 있다면, 그건 차라리 기적이다. 그 사이 우리는 어느 때 어디선가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그리고 잊힌다.”

정길연(55·사진)의 신작 장편 ‘달리는 남자 걷는 여자’(나무옆의자 로망스컬렉션 시리즈 9)는 되풀이되며 나선형으로 나아가는 사랑에 관한 소설이다. 세상에 널린 게 흔한 사랑 이야기라지만, 그 사랑들은 천차만별이어서 어느 하나 같지도 않고 어느 하나 아프지 않은 것도 없다. 아파도 시간이 진행되면 또 어느새 새로운 사랑을 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운명을 피하기 쉽지 않다.

프리랜서 사진작가였던 서은탁은 그를 향해 다가오던 여자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깊은 죄책감을 안고 고향에 돌아와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조용히 산다. 이 남자는 머릿속을 말갛게 비우기 위해 매일 해질 무렵이면 방파제 길을 달렸다. 스스로에게 내린 유배이자 속죄와 망각을 위한 처방전이었다. 이곳에 마린이라는 스물두 살짜리 여자가 내려온다. 생모의 연고지를 찾아온 것인데, 그녀의 생모 유소정은 은탁이 짝사랑했던 세 살 위 성당 누나였다. 소정은 사생아인 린을 낳고 바닷가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사랑했던 그 여인의 딸이 나타나 은탁 주변을 맴돌면서 새로운 사랑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6·25전쟁 끝물에 나온 과부의 사생아였던 안나가 다시 사생아 소정을 낳고, 소정은 또하나의 사생아 린을 세상에 태어나게 했다. 마린의 아버지 마영후는 첫사랑 아내를 두고 소정을 탐했다. 이들의 업보 같은 사랑의 연계고리는 기구하고 안타깝다. 복잡한 사연이지만 소설을 풀어가는 정길연의 스텝은 경쾌하고 날렵하다. 대사들이 세련되고 흥미롭다. 사랑했던 여인의 환생인 듯한 린을 은탁은 한사코 경계하지만 결국 ‘몹쓸 기억상실의 징후’는 시작된다.

“보이지는 않지만 명백히 존재해온 저만의 방화벽이 하나씩 해제되고 있다면…. 일상의 자잘한 규칙들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다면…. 감각이 이성을 추격해 드디어 저만치 따돌렸다면…. 그것은 필경 사랑의 형기를 치르고 있는 자들의 몹쓸 기억상실의 징후일 테다.”

정길연은 “잘려나간 기억의 환지통(幻肢痛)을 앓는 사람들, 이 소설은 망각과 복원, 기억의 소멸과 기억의 재구성에 관한 그들의 이야기”라며 “그 어디쯤에서 그들은 운명이든 우연이든 마주친다”고 작가의 말에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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