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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넉넉한 인정 설날 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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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1-17 21:34:54 수정 : 2017-01-17 21:3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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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서도 새해 문안 올리는 조하의식
지금은 생소한 윷점·승경도놀이 즐겨
이제 곧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인 설 연휴가 시작된다. 다양한 설날 풍속은 우리 선조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19세기 학자 홍석모가 조선시대 세시풍속을 정리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설날 풍속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궁궐에서는 왕에게 새해의 문안을 드리는 조하(朝賀) 의식이 있었다. 삼정승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새해를 축하하는 글과 옷감을 바친 후에 정전(正殿)의 뜰에서 새해 인사를 올렸다. 일반 백성들은 제물을 사당에 베풀고 제사를 지내는 정조(正朝) 차례 행사를 진행했으며, 남녀 아이들은 모두 새옷으로 갈아입었는데 이를 ‘설빔’이라 했다. 차례가 끝나면 집안 어른들과 동네의 연장자를 찾아 새해 첫 인사를 드리는 ‘세배’를 했으며, 세배 때 음식인 ‘세찬(歲饌)’과 술인 ‘세주(歲酒)’를 받았다.

설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식인 떡국에 대해서는 “멥쌀가루를 쪄서 떡판에 놓고 나무자루가 달린 떡메로 무수히 찧은 다음 손으로 둥글게 하여 기다랗게 늘여 만든 것을 가래떡이라 한다. 이것을 얄팍하게 돈 같이 썰어 장국에다 넣고 쇠고기나 꿩고기를 넣고 끓인 다음 후추가루를 친 것을 탕병(湯餠·떡국)이라 한다”고 했다. 또한 “세속에 나이 먹는 것을 떡국을 몇 그릇 먹었느냐고 한다”라 하여 당시에도 떡국을 먹어야 한 살이 먹는다고 생각했다.

윷점과 오행점을 쳐서 한 해의 운수를 보았고, 둥근 나무를 굴려 관직에 먼저 진출하는 것을 승부하는 승경도 놀이는 새해에 주로 하는 놀이였다. 친척이나 지인들을 만나면 ‘과거에 합격하시오’, ‘승진하시오’, ‘아들을 낳으시오’, ‘재물을 많이 모으시오’하는 덕담을 주고받았으며, 도화서에서는 장수를 상징하는 신과 선녀 등의 그림을 그려 왕에게도 올리고 서로 선물도 했는데, 이를 ‘세화(歲畵)’라 했다. 세화는 오늘날의 연하장과 비슷한 기능을 했다.

16세기 학자 유희춘이 쓴 일기인 ‘미암일기’를 통해서도 설날의 모습을 접할 수가 있다. 1568년 1월 1일에는 “흐리고 눈이 오다. 새벽에 여러 사람이 와서 세배를 했다. 날이 밝기 전에 관대를 갖추고 부사 곽군과 더불어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였는데, 나는 동편에 서고 곽은 서편에 서서 12배를 하고 산호(山呼·천세를 부름)를 하고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1571년 1월 1일에는 “닭이 울자마자 대소의 사람들이 와서 세배를 했는데 모두 기록할 수가 없다. 박해(朴海)가 소다리 한 개와 떡을 보냈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세배를 하고 선물을 주고받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윤홍중이 신력(新曆) 1건을 보내왔다’는 기록에서는 새해를 맞아 달력을 받았던 상황도 알 수 있다.

1571년과 1576년의 1월 1일에는 직접 쓴 시를 일기에 기록하고 있는데 지난해에 대한 감회, 새해의 다짐, 포부 등이 담겨 있다. 새해에 신년 목표를 세우는 것은 현재의 상황과도 닮아 있다. 설의 어원에는 ‘낯설다’라는 의미가 있는데, 설날은 모든 사람들에게 낯선 한 해에 대한 새로운 설렘을 안겨다준다. 새로운 희망과 기대를 더 크게 가져보는 한 해를 맞이했으면 한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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