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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포츠담 항일 ‘비밀결사대’ 한인구락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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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2-23 22:06:00 수정 : 2017-04-11 14: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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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서남쪽으로 25km가량 떨어진 곳에는 포츠담이라는 도시가 있다. 이곳에도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는 사적지가 있다. 1920년대 초 포츠담시에 사는 한인들이 ‘포츠담 한인구락부’를 결성했다.

일제의 자료에는 “표면상 이들의 친목기관이라고 칭하고 있지만, 동 구락부는 능히 포츠담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 작년 대지진 때 제국에 대한 재독 한인 활동의 진원지가 포츠담이었다. 이 구락부는 일종의 비밀정치결사(機密政社)”라고 기록돼 있다. 또 다른 일제의 자료에는 “포츠담에는 조선인이 경영하는 조선식 요리점이 있어 부근 조선학생들이 토요일, 일요일 등에 그곳에서 회담하여 거의 조선인 학생 구락부로 보였다”고 적고 있다.

포츠담 한인구락부는 일본에서 간토대지진이 발생하자 일제의 만행을 세계 각국에 알릴 목적으로 1923년 10월 26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재독한인대회’에서 주도적인 역할했다. 포츠담 한인구락부는 한국식당에 모인 한인 학생들이 주요한 멤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포츠담 한인구락부에서는 1925년 8월 29일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국치기념식을 거행했는데, 한인 7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이극로(1893∼1978) 선생이 감상을 발표했다.


1920년 독일에서 결성된 ‘포츠담 한인구락부’가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는 거리와 이극로 선생(작은 사진).
당시 포츠담 한인구락부가 있었던 ‘알트 루이젠 슈트라세’라는 거리명은 독일 통일 이후 ‘체펠린 슈트라세’로 변경됐다. 현재는 이 거리명과 주소가 없어져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 거리 모양으로 보았을 때 옛 ‘여성의 집(A F P.V.)’ 건물 주변의 공터가 포츠담 한인구락부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에서 활동했던 이극로 선생은 경남 의령 출신으로 1920년 중국 상하이 퉁지대학 예과를 마치고, 독일로 건너가 1927년 베를린대학 철학부를 졸업했다. 1929년 ‘조선어사전’ 편찬 집행위원, 1930년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1936년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위원 및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지냈다.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돼 징역 6년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아 풀려났다. 1946년 건민회 위원장을 지냈고, 1948년 4월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에 갔다가 잔류했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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