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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찬의 軍]“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6.25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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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6-25 08:00:00 수정 : 2017-06-24 11: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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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 상봉을 마친 사람들이 헤어지기에 앞서 서로 손을 맞잡으며 석별의 정을 나누고 있다. 게티이미지
사람의 특성을 가리키는 표현 중에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이 있다. 살아오면서 머릿속에 남은 모든 기억을 안고 생을 보내는 것은 정신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인간은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잊어버리거나 무의식의 세계에 깊이 넣어두고 자신에게 이로운 기억은 머릿속에 남겨두곤 한다.

하지만 한반도의 남부에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떠올리면 즐거운 기억은 아니지만 오늘날 우리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바로 6.25 전쟁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 전역에서 북한군의 일제 포격을 감행하면서 시작된 6.25 전쟁은 한반도는 물론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뒤바꿨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극동의 작은 나라를 돕기 위해 수만명의 외국 청년들이 한반도에 도착해 전쟁터로 달려갔다. 그 중 일부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북한군의 남침에 맞서 소총을 들고 전선으로 향했던 학도병들도 잊을 수 없는 존재다.

수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6.25 전쟁은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이 발효되면서 64년째 휴전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6.25 전쟁의 영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국민들을 단결시키고 국가의 안정에 도움이 된 측면도 있지만 자신과 뜻이 다르거나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종북 세력으로 몰아붙이는 이분법적 이념관, 상명하복식 군대 문화에 따른 조직의 경직성,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남을 배려하지 않는 태도 등은 6.25 전쟁이 남긴 어두운 그림자다.

◆ 전장에 몸을 던진 이름 없는 전사들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은 6.25 당시 우리나라를 도왔던 수많은 외국 군인들 중에서도 우리가 특히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다. 가난한 나라였고 한반도 정세에 개입해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이익도 없었지만 유엔의 요청에 기꺼이 응했기 때문이다.
6.25 전쟁에 참가한 에티오피아 걍뉴부대원들이 전방을 향해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다.
1950년 7월 중순 하일레 셀라시에 에티오피아 황제는 유엔으로부터 한국을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파병을 약속했다. 에티오피아는 다른 나라를 돕기에는 사정이 어려웠다.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경제 사정이 좋지 못한데다 전투를 할 수 있는 병력도 장비도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1935년 이탈리아의 침공을 받았을 때 국제연맹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어느 나라도 도와주지 않았던 쓰라린 경험을 잊지 않았던 에티오피아는 황실근위대에서 1000여명을 차출해 1개 대대를 구성, 한국에 파견하기로 했다. 셀라시에 황제는 이 부대에 ‘격파하다’라는 뜻의 ‘강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1951년 5월 6일 부산에 도착한 ‘강뉴’부대 1진은 2개월 동안 미군 교관들의 훈련을 받고 미 7사단 32연대에 배속돼 6.25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강원도 화천 북쪽 노동리에 배치된 이들은 전방에 배치된 지 3일 만에 중공군과 격전을 치렀다. 1952년 3월 29일 부산에 도착한 강뉴부대 2진은 중부전선 삼각고지에서 중공군과 싸웠고, 1953년 4월 16일 부산에 도착한 강뉴부대 3진은 휴전 때까지 강원도 춘천에서 중공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121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했다. 전쟁이 끝난 뒤 귀국한 참전용사들은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한 에티오피아는 참전용사들을 도울 여력이 없었다. 1971년 쿠데타로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공산주의에 맞서 싸웠다는 이유로 정치적 핍박을 받았다.
6.25 전쟁에 참가한 에티오피아 걍뉴부대원들이 총을 들고 부대 밖에서 경계를 하고 있다.
학업을 중단하고 펜 대신 총을 잡았던 학도의용군도 잊어서는 안 될 존재다. 육군군사연구소의 6.25 관련 자료에 따르면, 학도의용군의 시초는 1950년 6월 28일 경기도 수원에서 학생들이 만든 ‘비상학도대’다. 이후 국방부 정훈국 지도 아래 대전에서 7월 4일 만들어진 ‘의용학도대’가 같은달 19일 대구에서 비상학도대와 통합되면서 학도의용군이 본격적으로 전선에 투입됐다. 30만명이 참전했던 학도의용군 중 전사자는 7000여명. 이들은 군번도 계급도 없이 싸우다 숨졌다. 영화 <포화속으로>의 실제 사례로 알려진 1950년 8월 11일 포항여중 전투가 대표적인 학도병 참전 사례다.

◆ 20세기 세계에서 가장 긴 전쟁의 명암(明暗)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로 교전행위가 중단된 6.25 전쟁은 64년째 ‘소리 없는 전쟁’을 지속하고 있다. 세계 역사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휴전이 지속되면서 20세기 들어 일어났던 전쟁 중 가장 긴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북한군의 진격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하는 피난민들.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졌다. 게티이미지
3년간의 격렬했던 전쟁과 64년째 이어지는 차가운 남북 대치 국면은 우리나라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낙동강부터 압록강까지 전선이 오르내리면서 남북의 인구는 큰 폭의 이동이 불가피했다. 공산주의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북쪽으로, 민주주의를 원하던 사람들은 남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정전협정 직후 남북의 체제는 더욱 공고해졌다. 남측은 북한군의 만행을 강조하는 반공 이념을 내세워 국민들을 단결시키고 안보 태세를 강화했다. 북측은 반미, 반제국주의 노선을 강화하며 사회주의 체제를 굳히고 김일성 일가의 세습을 정당화하는 우상화에 열을 올렸다.

남과 북의 대치 국면은 체제 경쟁으로 이어졌다. 양측은 전후 복구 사업을 비롯한 경제 건설과 외교전 등 모든 분야에서 상대방보다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해 ‘속도전’을 벌였다. 우리나라 경제가 고도 성장을 구가했던 것도 일정 부분은 체제 경쟁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남북간 체제 경쟁은 웃지 못할 유치한 자존심 싸움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비무장지대(DMZ) 내 민간인이 거주하는 남측의 대성동 마을과 북측의 기정동 마을에는 국기게양대가 있다. 1970년대 대성동 마을에 48m 높이 태극기 게양대가 설치되자 기정동 마을에 더 높은 인공기 게양대가 설치됐다. 대성동 마을 국기 게양대가 1982년 1월 99.8m로 높아지자 한 달 뒤 기정동 마을에는 165m 높이 게양대가 들어섰다.

6.25 전쟁 직후 벌어진 극단적인 이념대립은 우리 사회의 다양성과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했다.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서 있는 사람이 서로를 향해 총을 쏠 때, 그 중간에서 양측의 싸움을 말리고 대안을 찾으려는 사람은 양쪽에서 날아온 총탄에 맞아 죽는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 중도 노선은 ‘빨갱이’ 취급을 받았다.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사람을 종북 세력으로 몰아붙여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일이 거듭되면서 무고한 피해자들도 잇따라 발생했다. 이는 우리 사회의 정치적 다양성과 인권 등 민주주의 가치 발전을 저해했다. 
미군의 포로가 된 북한군 병사들이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이동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참혹한 전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 DNA는 우리 사회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으로 만들었다. 북한의 위협에서, 굶주림에서, 어렵게 벌어들인 돈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에게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이 우선시되면서 우리 사회는 무한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 승자독식 사회로 변해갔다. 남을 배려하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는 것이 당연시됐고,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은 재기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는 경쟁의 강도가 계속 높이는 악순환으로 이어졌고, 이에 따른 정신적 스트레스와 좌절 등은 불특정 다수를 향한 범죄로 표출되기도 했다.

전쟁 공포에 따른 심리적 불안은 1970~1980년대 엽기적인 살인 사건으로 이어졌다. 1975년 8~10월까지 17명을 살해한 김대두, 1975년 6월 아내를 목졸라 숨지게 한 뒤 사체를 토막냈던 이팔국, 1981년 11월 노름빚을 갚기 위해 중학생 제자를 납치 살해하고 돈을 요구한 주영형, 1982년 4월 하룻밤 동안 62명을 살해하고 자살한 우범곤 등 살인사건이 꼬리를 물었다. 전쟁의 충격에 따른 트라우마를 제대로 치유하지 않고 교육에 따른 사회화도 미진했으며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하려 했던 1950~1960년대의 사회상이 낳은 결과였다.

6.25 전쟁은 기존의 질서를 송두리째 무너뜨린 비극이었다. 수백만명이 사망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소중한 가족과 생이별해 생사 확인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전쟁이 남긴 커다란 상처를 치유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외형적인 부분만 개선됐을 뿐이다. 60여년이 흐르면서 6.25 전쟁에 대한 기억이 차츰 흐릿해지는 상황에서 전쟁터를 누비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기억하는 한편, 전쟁이 낳은 사회적 부작용을 극복하고 사회통합을 위한 구체적인 작업들이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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