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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문서로 본 한국 재건사] ③ 6·25전쟁 중 노획한 김일성 승용차에 숨겨진 비밀

입력 : 2017-11-21 19:13:59 수정 : 2017-11-22 00:5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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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6사단, 묘향산 일대서 노획 / 구 소련 제작, 지스 리무진 3HC / 이승만, 전쟁영웅 워커에 애정 각별 / 사고로 숨지자 아내에게 전달키로 / 8군사, 美합참·극동사에 지침 요청 / 미군, 접수 거부에 이승만 강력 항의 / 5달 후 美 정부 승인으로 이견 해소 / 승용차, 미국행→한국귀환 풍파 겪어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2층 전시실에서는 6·25전쟁 중 국군이 노획한 김일성 승용차가 관람객을 맞고 있다. 소련 제작·기증→김일성 승용차→국군 전리품→미국 기증→한국 귀환의 풍파를 겪은 차다. 이 차의 미국행을 놓고 ‘주겠다’는 한국과 ‘받을 수 없다’는 미국 사이에서 의견차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김일성 승용차.
전쟁기념관 제공
숙명여대 글로벌거버넌스연구소(소장 최동주)는 20일 “미국 국가기록원(NARA)에서 6·25전쟁 당시 노획한 김일성 승용차와 관련한 문건을 입수해 분석한 결과, 이 승용차의 미국행을 놓고 한·미 간에 갈등이 존재했던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김일성 승용차가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기까지 숨겨졌던 비사(秘史)가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이야기는 이렇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 중 윌튼 해리스 워커 주한 미국 육군 제8군사령관(이하 당시 직책)이 교통사고로 숨지자 워커 사령관 아내에게 이 차를 선물했으며, 그는 미국으로 건너간 차를 타고 다니다 고장이 나자 다른 승용차로 교환했다는 것. 이후 행방이 묘연하던 이 차량은 지갑종 유엔한국참전국협회장 노력으로 31년 만인 1982년 한국으로 되돌아왔으며, 이후 경남 사천 항공우주박물관에 전시돼 있다가 전쟁기념관으로 옮겼다는 정도다.

1950년 12월 25일부터 1951년 6월 28일까지 제8군사령부(이하 8군사)와 미국 극동군사령부(FECOM·이하 극동사), 우리 정부 사이에 교환된 전문, 서한, 보고서 등을 분석하면 그동안 몰랐던 사실이 드러난다. 관련 문건의 키워드는 △워커 장군 사망 △북진 작전 중에 노획한 김일성 승용차 △이승만 대통령 △워커 장군 미망인 등으로 구성됐다.

김일성 승용차 처리 문제가 최초 거론된 것은 워커 사령관 장례식이 치러지고 나서 약 일주일 뒤인 1951년 1월 10일 8군사가 극동사에 발송한 공문을 통해서다. 공문에는 김일성이 타던 승용차를 노획한 과정과 승용차 제원, 기증에 관한 문제가 명시됐다.

김일성 승용차는 유엔군이 북진을 펼치던 1950년 10월 22일 평안북도 묘향산 일대 구장동 근처에서 국군 육군 제6사단 제2연대 정찰부대가 노획했다. 옛 소련에서 제작된 지스(ZIS) 리무진이며 모델명은 3HC, 차량번호 6911001087이었다.


윌튼 해리스 워커 전 미국 육군 제8군사령관. 6·25전쟁 중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막아낸 용장으로 알려졌다. 서울 용산기지에 있던 동상이 지난 4월 주한미군의 경기도 평택기지 시대 개막과 함께 캠프 험프리스로 이전됐다.
문건에 따르면 이 대통령이 그해 11월 중순쯤 전리품을 워커 사령관에게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고 6·25전쟁의 국면을 바꾼 워커 사령관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던 것으로 추정됐다. 기증 의사가 담긴 공식 서한은 12월 9일 장면 국무총리 명의로 워커 사령관에게 전달됐다. 그런데 워커 사령관 사망이라는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한다. 워커 사령관이 12월 23일 아들인 샘 S 워커 대위(훗날 미국 육군 대장)의 은성무공훈장 수상을 축하해 주기 위해 가던 중 현재 서울 도봉구 지역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우리 정부는 이에 이 차를 워커 사령관 아내에게 전달하기로 방침을 정한 뒤 재차 의견을 타진했다고 한다. 8군사는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우리 정부에 답변을 주지 않았다. 대신 상급 부대인 극동사에 워커 사령관 대신에 아내가 받을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 지침을 내려줄 것을 요청한다는 공문을 보냈다.

미국 극동군사령부(FECOM)가 1951년 1월 20일 주한 미국 육군 제8군사령부에 김일성 승용차를 한국 정부에 반환하라는 지시를 내린 문건.
숙명여대 글로벌거버넌스연구소 제공
극동사는 1951년 1월 20일 답신을 통해 당시 부산항에 보관 중이던 김일성 승용차를 한국 정부에 반환할 것을 지시한다. 미국 합동참모부와 극동군사령관 명의로 “미군은 전리품을 받을 수 없다”며 기증을 거부한 것이다. 8군사는 이에 2월 12일 신성모 국방부 장관에게 공문을 보내 승용차 반환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이번에는 한국 측에서 강력히 항의했다. 이 대통령이 6·25전쟁 영웅 아내에게 이 전리품을 전달해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던 때문이다. 반환 명령을 받은 8군사도 물러설 수 없었다. 대치 아닌 대치가 계속되자 극동사는 3월 13일 8군사에 주한 미국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하라는 지시를 하달할 정도였다.

이런 입장차는 6월 12일 워커 사령관 아내가 이 차를 받아도 된다는 미국 정부의 승인이 떨어져 해소됐다. 어떤 이유로 미국 정부가 이런 결정을 내려졌는지에 대한 설명은 기술되지 않았다. 이후 김일성 승용차는 부산항 출발을 6월 26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항에는 7월 9일 도착하는 것으로 미국행 계획이 세워졌다. 우여곡절 끝에 김일성 승용차가 미국 땅을 밟게 된 것이다.

숙명여대 글로벌거버넌스연구소 이민룡 연구교수는 “미국군 지휘부는 미국 사회의 부정적 여론을 고려해 김일성 승용차의 개인 취득에 부정적 입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이번 문서 분석을 통해 워커 사령관에 대한 이 대통령의 애정, 김일성 승용차의 미국행과 관련한 구체적 경위가 파악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취재지원=이민룡 숙명여대 연구교수

박병진 군사전문기자 worldp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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