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채무자의 연체 이력을 삭제한 신용사면자 3명 중 1명이 다시 빚을 갚지 못해 연체자로 전락했다고 한다. 국내 신용평가사에 따르면 지난해 신용사면을 받은 286만7964명 중 95만5559명(33%)이 연체 기록을 남겼다. 이들이 갚지 못한 대출금은 28조5160억원, 1인당 4283만원에 이른다. 새 정부도 올 연말까지 약 324만명에 이르는 역대 최대 규모의 신용사면 단행을 앞두고 있는데 ‘버티면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도덕적 해이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사정이 이런데도 여권의 금융 포퓰리즘은 갈수록 위험수위를 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는 그제 “저신용·저소득일수록 높은 금리를 부담하고 고신용·고소득 계층은 낮은 금리를 누린다”며 “지금 금융구조는 역설적”이라고 했다. 이재명 대통령도 지난주 국무회의에서 “서민에게 15.9% 고금리는 잔인하다”며 “초우량 고객에게 0.1%포인트만이라도 (이자)부담을 더 지워 어려운 사람들에게 싸게 빌려주자”고 했다. 신용 질서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발상이다.
금리는 채무자의 상환능력을 반영하는 시장 가격이다. 신용이 높을수록 낮은 이자를, 떼일 위험이 클수록 높은 이자를 물리는 게 금융의 작동원리다. 이게 망가지면 필연적으로 시장은 혼돈에 빠지고 금융 부실도 불어날 수 있다. 그 피해는 국민이 떠안아야 한다. 성실히 경제활동을 하는 정직한 시민들에게 고신용자라고 해서 더 많은 이자를 내라고 하면 누가 납득하겠나. 저신용자에게 금리를 낮추라고 하면 금융 회사들은 아예 대출을 꺼릴 가능성도 높다. 문재인정부 시절인 2021년 법정 최고금리가 24%에서 20%로 낮아진 후 합법 대부업체들이 저신용자 대출을 줄여 수십만명이 불법사채시장으로 내몰렸다. ‘금융 약자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는 선의의 정책이 외려 취약층을 더 어렵게 만든 것이다.
정부가 신용불량과 빚 수렁에 허덕이는 서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건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그렇다고 금융원리와 신용체계까지 허물어서는 안 될 일이다.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다. 은행 돈을 빌릴 수 없는 취약계층을 도울 다른 해법을 찾아야 한다. 억지로 금리를 낮추거나 빚 탕감을 반복하기보다는 저신용자의 신용능력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 복지 차원의 재정지원과 함께 일자리 창출로 소득을 높여 취약계층이 스스로 빚을 갚을 수 있는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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