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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 불안한 밤길 해결” 지구촌 ‘핑크택시’ 바람

입력 : 2009-11-23 12:39:20 수정 : 2009-11-23 12:3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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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등하교·노인 외출 등 ‘서비스 진화’
각국 정부도 “치안문제 해결에 도움” 환영
일각 “눈에 잘 띄어 오히려 범죄에 무방비”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 밤길이 두려운 여성들이 귀가를 서두른다. 여성을 상대로 한 납치·강간·강도사건 소식을 듣고도 어둠 속에 자신을 맡길 정도로 대담한 여성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 밤길이 무서워 탄 택시조차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 심야에 택시를 모는 여성 운전사도 남자 승객이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핑크택시’다. 기사도 여성이고, 손님도 여성 외엔 절대로 태우지 않는다. 남자는 아무리 다급하게 손을 흔들어도 핑크택시는 서지 않는다. AP통신 등 주요 외신들은 “불안한 밤길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분홍색 물결(택시)이 넘실거린다”며 ‘핑크택시 바람’을 소개하고 있다.

◇영국 런던에 도입된 핑크택시.
세계일보 자료사진
◆핑크택시는 발전한다=
핑크택시가 등장한 것은 대략 2006년쯤부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러시아 모스크바에서는 택시 외관을 분홍색으로 칠하고 내부도 여성 취향의 인테리어로 꾸민 핑크택시가 등장했다. 운전기사도 물론 여자다. 이 택시는 범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던 모스크바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영국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핑크택시가 나타났다. 영국 워링턴에서 ‘핑크 레이디 택시’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이 택시사업은 신혼부부라도 남성 승객은 거절할 정도로 철저한 ‘여성 전용’으로 인기를 끌었다. 단, 엄마와 함께 타는 12살 미만의 남자 어린이만 예외다.

이 택시는 기존의 핑크택시처럼 단순히 여성만을 태우는 수준에서 벗어난 차별화된 서비스로 눈길을 끌었다. 영국에서 일하는 주부가 많다는 점을 고려해 엄마를 대신해 아이들의 등하교를 시켜주고, 여성 노인이나 환자의 외출을 돕거나 쇼핑까지 할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를 해 관심을 얻었다.

지난 3월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도 일명 여성택시(Girl Taxi)라 불리는 여성 전용 ‘바넷 택시’(Banet Taxi)’가 등장했다. 푸조 차량 3대를 개조한 이 택시는 모두 외관을 분홍색으로 꾸미고 운전기사들도 모두 여성이다. 기사들은 하얀 티셔츠에 분홍색 넥타이를 매고 있으며, 분홍색 꽃 장식까지 머리에 달아 여성성을 한껏 강조했다.

◇영국 워링턴에서 서비스하고 있는 ‘핑크 레이디 택시’. 신혼부부라고 해도 남자는 태우지 않을 정도로 엄격한 ‘여성 전용’을 시행 중이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레바논은 아랍 국가들 사이에서 그나마 여성차별이 심각하지 않은 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서방국가에 비해선 여성들이 느끼는 차별은 심하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여성들이 느끼는 범죄에 대한 공포심도 크다. 여성성을 강조한 핑크택시가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다.

지난달 핑크택시를 처음 도입한 멕시코 지방도시 푸에블라는 도입 시기가 가장 최근인 만큼 각종 첨단장비를 갖춘 것이 특징이다. 이 택시는 차량 하나하나에 GPS 시스템을 갖춰 현재 택시 위치가 회사에 실시간으로 전송되도록 했다. 차량 내부에는 긴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상황실로 바로 연락할 수 있는 비상버튼도 설치돼 있다.

치안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푸에블라주 정부는 핑크택시를 적극 환영하고 있다. 개인 사업가가 580만페소(약 5억원)를 투자해 35대의 택시로 사업신청을 하자 푸에블라주 정부는 선뜻 영업권을 내줬다. 여기에 여성 운전사들에 대한 직업훈련까지 지원하는 등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환영과 우려 동시에=‘핑크택시’에 대해선 일단 환영의 목소리가 높다. 늦은밤 여성들이 범죄의 표적이 되는 걸 피하기 위해 택시를 탔는데, 남자 기사와 단 둘이서 어두운 골목길 등을 지날 때면 더 불안감을 느낀다. 그렇다고 택시를 타지 않을 수도 없는 게 그동안 여성들의 딜레마였는데, 핑크택시가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줬다는 것이다.

실제 핑크택시를 이용하는 여성들이 대개 긍정적 입장을 보였다.

핑크택시를 이용하는 레바논의 한 여성은 “친구 중 상당수가 남성 택시기사에게 성희롱을 당하는 등 위험한 일을 겪은 경험이 있다”며 “나도 열다섯살 때 납치될 뻔했지만 갖고 있던 칼로 위협해 간신히 탈출한 적이 있다. 핑크택시는 정말 반가운 존재”라고 말했다.

멕시코에서 핑크택시를 이용한 헤르메린다 아길라는 “택시를 탈 때 여성이 운전을 하고 있으면 안심이 된다”고 밝혔다.

지난달 멕시코의 핑크택시 도입이 알려진 뒤 국제 여행 사이트 마타도르 네트워크가 실시한 온라인 토론에서 여성들은 대부분 환영의 뜻을 비쳤다. 온라인 토론에서 여성 네티즌은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에 대해 근본적인 해결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설사 ‘임시처방’에 불과하다고 해도 핑크택시를 타면 안심이 되는 것은 사실”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이처럼 핑크택시가 운영되고 있는 대부분 국가의 여성들은 ‘안전’을 이유로 환영하고 있지만, 여성 운동가들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안전한 여성 귀가길을 보장하기 위해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다.

치안이 불안하면 경찰력을 확대하거나, 가로등이나 CCTV를 설치하고 우범지역에 대한 순찰을 강화하는 등의 조치가 필요한데, 이렇게 시간과 돈이 드는 해결방법은 도외시하고 핑크택시 도입으로 단순히 문제를 가리려고만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여성과 남성이 ‘공존’하는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게 힘에 부치니 핑크택시와 같이 여성을 남성으로부터 ‘분리’하는 방식으로 여성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멕시코의 한 여성 운동가는 “우리는 지금 21세기에 살고 있는데 여성택시는 여성들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 이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발상에 불과하다”며 “핑크택시 등장이 여성에 대한 폭력을 뿌리뽑는 데 절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여기에 민간업체들이 핑크택시 도입을 주도하는 점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핑크택시 도입 국가나 지자체들은 민간업체들의 핑크택시 신청을 허가만 해줄 뿐 여성안전대책엔 돈 한푼 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아 재주는 민간업체가 부리고 생색은 국가가 내는 셈이다. 실제로 핑크택시를 운영하고 있는 지역을 살펴보면 동아시아나 중남미, 중앙아시아 등 치안이 불안한 개발도상국에 몰려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운전자와 승객 모두 여성이기 때문에 오히려 범죄의 표적이 될 확률이 높다는 현실적인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택시 색깔이 눈에 확 띄는 분홍색이어서 식별이 쉽고 모든 핑크택시 차량에 첨단장비를 달아놓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다.

여성 기사 확보, 남성 승차 거부로 인한 수익성 보전 등의 문제도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가 일어나는 상황에서 ‘안전한 귀가’를 원하는 여성들의 수요 때문에 핑크택시의 인기는 쉽게 식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조풍연 기자 jay24@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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