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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51> 폐허의 미학

입력 : 2012-02-28 17:57:00 수정 : 2013-11-22 16:3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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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무한한 시간이 말을 거는 곳…텅 비어있지만 가득찬 ‘역설의 미학’ # 폐허, 사라진 시간에 대한 기억

보이지 않던, 숨겨졌던 시간이 드러나는 순간을 처음 경험하는 것은 상상만 해도 황홀한 일이다. 슐리만의 트로이 발굴이나 인구 2만명이 살았다는 로마시대의 휴양도시 폼페이의 발굴 장면 등 역사 속에만 기록되었던 상상의 도시를 발견한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가슴이 설렌다.

반 룬의 『예술사 이야기』에 의하면 고대도시 폼페이의 흔적은 1594년에 처음 발견된다. 나폴리 근처에서 수로를 내기 위해 터널을 파던 도메니코 폰타나라는 이탈리아 건축가가 로마 시대 조각상과 항아리를 비롯하여 냄비, 등불, 그 밖의 여러 가지 생활도구를 발견했다. 당시에는 그저 우연히 발견된 고대 로마 시대의 집터 찌꺼기라고 여겨져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 그 후 150여년 동안 같은 장소에서 로마 시대 물건임이 틀림없는 갖가지 유물들이 너무 많이 발견되자, 결국 사람들은 그 지역 전체를 발굴하여 두껍게 깔린 잿더미 아래에 무엇이 숨어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폼페이 유적. 집과 지붕 정도가 원형을 상실했을 뿐 서기 79년의 베수비오 화산 폭발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1763년에 시작된 그 발굴로 인해 발견된 도시는 집과 지붕 정도가 원형을 상실했을 뿐 서기 79년의 베수비오 화산 폭발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드문드문 발견되었던 이전의 유적과 달리 완벽한 도시 발굴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폼페이는 에트루리아 시대에 이미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고, 기원전 1세기의 로마 역사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도시였다. 사람들이 배를 타고 피하거나 안전한 지하 대피소를 찾으려고 아우성쳤던 운명의 날 아침을, 도시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1971년 7월, 공주의 한 벽화고분에서는 문화재관리국에서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뒤쪽에 도랑을 파고 있었다. 그러다가 7월 5일 한 인부의 괭이 끝에 벽돌이 걸렸다. 벽돌을 따라 파 내려가니 입구인 듯한 아치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발견은 다음날 급히 서울로 보고되고 당시 국립박물관장을 지내고 있던 김원룡 박사는 바로 그날로 공주에 내려간다. 

하룻밤 만에 완료된 1971년의 무령왕릉 발굴 모습
사진=대전일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지석 첫머리에 ‘寧東大將軍百濟斯摩王’이라고 되어 있다. 무령왕이다. 우리나라 고분은 연대나 이름을 써넣지 않는 것이 하나의 특색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무덤을 파도 가장 중요한 연대를 알 수 없는 것이 공통된 안타까움이고 그것이 또 우리 고대 문화나 역사를 밝히는 데 근본적인 장애로 되고 있다. 그래서 유적을 파나 무덤을 파나 우리들의 가장 큰 소망은 연대가 써 있고 명문이 써 있는 유물들을 발견하는 것이고, 나 자신도 꿈에서 그런 물건을 파내고 이게 웬일인가 기뻐하던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이 눈앞에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는가.” (-김원룡,「죽은 사람들과의 대화-고분에서 배우는 일생」, 『노학생의 향수』 중에서)

김 박사는 그러한 엄청난 행운에 미처 감사하기도 전에 밀려든 기자들과 구경꾼들에 떠밀려,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천천히 진행되었어야 할 발굴 작업을 단 하루 만에 진행해야 했던 것을 평생의 회한으로 기억했다.

사라졌기에 보이지 않던 어떤 시간에 대한 기억, 그것이 폐허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나는 고건축이나 고미술을 보러 다녀보았던 경험들을 통틀어서 그 어떤 것도 폐허가 주는 감동에는 따라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단순한 장소와 공간과 그것에 개입하는 인간의 의지뿐이 아니라 거기에 무척 깊은 시간과 기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 폐허의 미학, 없음으로써 오히려 강력한 존재의 의미를 새기는 것

그래서 나는 폐허, 특히 오래된 절의 옛터에 가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경주 한복판에 꽃잎은 다 떨구고도 초연하게 앉아있는 황룡사 절터, 속초 산속에 단단하고 뾰족하게 남아있는 진전사 터, 고달사 터…. 나는 그 자리에 앉아서 햇볕을 쬐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그 안에는 나와 대상뿐이 아니라 우주에서 떠돌아다니는 무한한 시간이 쏟아져 내려와서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다. 그리고 그 감동의 강도는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태허(太虛)라는 말이 있다. 말을 그대로 해석하면 크게 비어있음이 되는데, 동양철학에서는 무척 중요한 개념이라고 한다. 크게 비어있음으로써 오히려 가득 차 있다는 의미이며 가장 기가 충만한 공간이라는 의미도 된다. 장자의 ‘지북유편(知北遊篇)’에 나오는 말로, 만물이 없어지는 형상이며 만물이 다시 생겨나는 형상이며 그릇이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그 태허의 공간은 넓고도 넓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며 아무나 노닐 수 있는 곳도 아니다.

“…누가 도에 대해 물었을 때 대답을 하는 사람은 도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도에 대해 질문한 사람도 역시 참된 도에 대해 듣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란 물어서도 안 되는 것이며, 묻는다 하여 대답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물어서는 안 되는 것을 묻는 것은 헛된 질문입니다.

대답할 수 없는 것을 대답하는 것은 진실한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이 없이 헛된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밖으로는 우주의 현상을 제대로 관찰하지 못했고, 안으로는 태초의 오묘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곤륜산 같은 고원한 경지에 가 보지도 못하고 태허의 거침없는 세계에 노닐어 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염거화상이 스승인 도의선사를 기리며 만든 탑과 부도가 남아있는 양양 진전사 터.
아무것도 없으나 기가 충만한 곳…. 나는 가끔 그런 곳으로 간다. 폐허의 공간이며 태허의 공간들에. 가령 강원도 양양언저리에 양양 비행장을 끼고 옆으로 한참 들어가면 나오는 진전사 터 같은 곳은, 황룡사처럼 너른 들을 품고 있다든가 멀찍이 산들이 에워싼 풍광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뜨문뜨문 나오는 탑과 부도가 절의 경계를 얼추 보여주며 묘한 느낌을 준다.

그곳은 신라 말 화엄불교를 숭앙하던 시절에 당나라에서 남종선을 배워 들어온 도의선사라는 분이 선종을 이식하고자 하던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의 제자 염거화상이 선종에서의 가르침대로 열반하여 부처가 된 스승을 기리며, 부도라는 새로운 형식의 조형물을 만들어 세워놓은 곳이다. 그러나 그런 의미와 자취는 다 닳아버리고 이제는 그저 석조예술품으로 남은 두 개의 돌 조각, 탑과 부도만 남아있다.

한번은 통도사 새벽예불에 참석했던 적이 있었다. 어스름한 새벽에 절 바로 앞에 있는 여관에서 일어나 열심히 달려가 예불시간에 맞춰 절에 도착했다.

사위 적막하고 캄캄해서 절에서 켜놓은 희미한 백열등을 구세주로 삼아 열심히 들어가 보니, 어디선가 스님뿐 아니라 통도사에서 주무시는 많은 일반인들이 나와 법당 안으로 질서정연하게 들어가고 있었고, 그 안에서 보이지 않는 선에 맞추어 질서정연하게 앉고 서고 절하는 모습이 아주 감동적이었다.

그런데 정작 수많은 사람들이 절을 하고 예를 올리는 불단에는 덩그러니 방석만 한 개 놓여 있었다. 통도사는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시는 곳이라서 불단 위에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고 방석만 놓는 것이었다.

존재하지 않기에 오히려 강한 존재감을 주는 이상한 역설과, 그로 인해 생기는 종교적 감화는 무척 강력했다. 없음으로써 오히려 강력한 존재의 의미를 새기는 것, 그런 역설의 미학이 바로 폐허의 미학이라고 생각한다.

최고의 폐사지로 손꼽히는 합천 대동사 터. 천 년의 시간과 천 년을 비추는 빛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 대동사 터, 천 년의 시간과 천 년을 비추는 빛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

몇 년 전 오랜만에 만난 선배와 점심식사를 할 때였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답사여행으로 주제가 흘러갔다. 예전에 고건축 답사 꽤나 다녔던 선배와 서로 답사의 경험을 풀어 놓으며 역시 답사의 꽃은 폐사지가 최고라고 입을 모으다, “어디까지 가봤니” 하는 식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서로 여기저기를 주워섬기다가 그 선배가 “내가 가본 절터 중에는 대동사 터가 참 좋았어, 거길 한번 가봐야 해, 아∼ 그 분위기!” 하며 진정으로 아련해지는 눈을 해가며 내게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곳은 불행히도 내가 가보지 못했던 곳이었다. 선배는 그 터가 경남 합천 어드메에 있다고 하면서 “그 분위기 정말 좋아”라는 소리만 연신 되뇌었고 그날의 시시한 힘겨루기는 나의 완패로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나는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의자를 끌어당기고 컴퓨터로 바짝 다가앉아 대동사 터를 검색했다. 몇 개의 사진이 떴는데 누군가 굉장히 좋은 카메라로 정밀하고도 침착하게, 초가을 무렵인지 희미하게 남아있는 여름의 초록 위로 갈색이 서서히 밀려오는 어느 새벽에 찍은 사진이었다. 아무것도 없고 그냥 등신불 크기의 불상만 눈에 들어왔고, “이곳은 사람들이 잘 모른다. 아! 참 좋다” 대충 그런 말이 적혀 있었다. “이 사람도 아까 선배와 똑같은 말을 하네.” 더욱 궁금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당시 나는 서울에 매여 있어서 답사는 서울 인근에 있는 광탄 보광사도 못가는 형편이었으니, 합천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시베리아 서북쪽 모서리 정도나 되는 멀고도 먼 곳이었다. 일이 그다지 바쁘지도 않으면서 시간을 내어 답사 갈 시간은 없는 나날이 그 후로도 한 몇 년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드디어 그곳에 갈 기회가 생겼다. 합천은 아니었지만 합천 바로 옆 동네인 의령에 일이 생겨 가게 된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대동사 터에 꼭 들르리라 마음먹고, 대전통영고속도로를 타고 무주, 함양, 산청을 지나 덕산 인터체인지로 들어갔다. 멀찍이 언제 보아도 코끝이 찡해지는 감동적인 산, 지리산이 쿵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커다랗게 앉아있었다.

지리산을 뒤로하며 그 길로 생미량, 대의를 지나 의령의 옆구리를 스치고 삼가를 지나 고개를 몇 개 넘어서 아주 한적한 마을로 접어들었다. 논과 밭 사이의 좁은 마을길로 한참을 더 들어가니 멀리 저수지 언저리에 돌부처와 석등이 보였다. 거기가 그 좋다던 대동사 터였다. 마치 전설의 문이 열리는 듯한 감동이 밀려왔다.

가까이 다가서서 보니 표정이 다 없어지고 몸짓이 다 지워진 사람 크기의 항마촉지인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가모니불과, 상대적으로 또렷한 표정으로 단정하고 야무지게 서 있는 석등과, 무척 굵고 구부정한 느티나무가 횡으로 나란히 서있었다.

그뿐이었다. 절 자리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었고 그냥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돌덩어리들을 맞춰서 한 구석에 나란히 모아놓은 듯했다. 아니면 누군가가 어느 예전에 느티나무에게 맡기고 출타한 듯했다.

과거의 어느 시절에는 저기 앉아있는 부처님이 잘 지어놓은 대웅전에 앉아서 허공을 배경으로 좌우에 산을 거느리고 앉아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사람들은 이 자리로 곧바로 머리를 조아리며 들어가지 않았을까? 그런 상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저 느티나무는 이 절이 들어설 무렵 심어놓은 느티나무일 것이고 그래서 나이를 합치면 삼천 살이 되는 세 친구가 나란히 양광을 모으며 앉거니 서거니 하고 있는 것이리라. 나는 그런 모습을 보았다. 영원같이 길고 긴 천 년의 시간과 천 년을 비추는 빛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을.
가온건축 공동대표·『작은 집, 큰 생각』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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