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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푸른 사탕수수밭… 노예들의 피눈물 기억할까

관련이슈 강주미의 올라 카리베

입력 : 2014-04-03 18:02:18 수정 : 2014-12-22 17: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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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미의 올라 카리베] 〈10〉기차 타고 잉헤니오스로 가다
쿠바의 트리니다드에는 기차역이 있다. 이것을 알게 된 것은 지도를 열심히 본 덕택이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기차를 탈 수 있단다. 증기기관차가 있다는 사실까지 알아 낸 후, 그곳까지 걸어서 갔다. 굳이 걸어가려고 한 것은 아니고 걷다 보니 그곳까지 가게 됐다.

트리니다드 외곽에 있는 기차역에는 증기기관차가 정말 있었다. 쿠바 사람들이 실제로 이용하는 기차는 증기기관차가 아니었다. 한 칸짜리 작은 기차는 전차에 가깝다. 옆 도시까지만 짧은 구간을 이동하는 그 차는 일반 쿠바인들이 많이 이용한다. 외국인이 타고 싶어 하는 증기기관차는 하루에 한 번 관광용으로만 운행한다. 내일 그 증기기관차를 타기로 하고, 오늘은 멈춰 있는 증기기관차를 구경만 했다. 지나가는 한 남자가 친절하게 내부도 구경시켜줬다. 예전에 이곳은 교통의 요지였을 것이고, 이 기차는 물자 운송 수단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기차역에 가야 했기 때문에 느긋하게 걸어 갈 수는 없었다. 자전거택시를 하나 잡아 타고 간다. 요금은 1000원 정도면 충분하다. 세 바퀴인 자전거택시는 뒷좌석을 2인용으로 만들었고, 햇빛 가리개도 있다. 다만 열심히 땀을 흘리며 페달을 밟아야 하는 운전사가 힘들 뿐이다. 기차역에 9시도 안 돼 도착하니, 9시10분에 표를 끊어 주겠단다. 기차역은 텅 비어 있었으나, 출발 시간이 되니 택시들이 외국인을 싣고 와 스무 명 남짓한 기차 좌석을 거의 다 채웠다. 기차를 타려고 할 때, 아차 싶었다. 휴대전화가 없었다. 통화는 별로 안 했지만, 동영상도 찍고 지도도 내려받아 사용하고 있었는데, 잃어버리니 아까웠다. 자전거택시를 탈 때 사진 찍어 놓은 게 있어서 다른 자전거 택시 운전사에게 보여줬다. 그는 누군지 안다며 자기가 가서 말해줄 테니, 걱정 말고 다녀 오라고 한다. 그 말을 믿고 간 건 아니지만, 이 기차를 놓칠 만큼 휴대전화가 중요하진 않았다. 

트리니다드 기차역과 코코탁시.
기차는 연기를 내뿜으며, ‘빠앙’ 소리와 함께 출발했다. 어제 본 진짜 증기기관차는 아니고, 이건 모습만 증기기관차로 기름으로 간다. 숲길도 달리고 강 위의 다리도 건너며 도착할 목적지는 ‘잉헤니오스(Valle de los Ingenios)’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 거대한 사탕수수 농장으로 착취해 가며 떼돈을 벌던 곳이다. 지금은 수확하고 싶은 만큼만 사탕수수를 키우고 있어서 농장이 많이 없어졌다. 그 당시는 설탕이 금보다 비쌌기 때문에 노동자들에게 강제노역을 시켜가며 이 밭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했다. 그러다 보니, 노동자들을 감시하는 탑이 생겨났고 재산을 모은 부자가 생겨났다. 지금 그 탑은 관광객이 올라가서 거대했던 잉헤니오스를 바라보는 전망대로 쓰이고 있으며, 부자의 집은 박물관과 식당으로 쓰이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기차가 도착한 마을은 잉헤니오스는 아니고, ‘마나카 이스나가(Manaca iznaga)’라는 작은 마을로 잉헤니오스 농장 주인이 살던 마을이다. 그래서 이곳에 탑이 세워져 있고, 그곳에서 잉헤니오스 사탕수수 농장 전체를 감시할 수 있었다. 끔찍하게 여겨졌던 그 탑에 나도 올라가 봤다. 좁은 계단을 올라가면 층층마다 창문이 없는 문이 있어 경치를 감상하기에 좋았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노동자들을 감시하는 무서운 탑이었으리라. 마치 거대한 수용소의 감시탑처럼 느껴진다. 끝없이 펼쳐진 잉헤니오스 농장은 짙푸른 초록빛깔 평야다. 지금은 고요하고 평화롭기만 하다. 그 시절 그 사람들은 다 어디 있을까.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들을 감시하던 탑은 지금 전망대로 쓰인다.
반나절을 같이 다니다 보니, 같은 기차를 탄 사람들끼리 친해졌다. 프랑스 가족은 아이 둘까지 넷이서 요트를 타고 카리브해를 여행 중이다. 다음 여행지는 나와 같은 자메이카다. 만약 나를 산티아고에서 만나면 태워준다고 했다. 이런 우연이 생기진 않겠지만, 그래도 기대가 됐다. 카리브에서 요트를 빌려 카리브 섬들만 여행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바로 이 사람들이 그랬다. 생각만 해도 너무 근사한 요트여행이다. 아이들은 풀 하나를 가지고 여러 가지 놀이를 한다. 30∼40㎞로 느리게 가는 기차에서 심심할 법도 한데, 아이들은 작은 것 하나에도 관심을 보인다. 보통 아이들이 아니다. 요트 여행을 오래해서 단련된 아이들이다. 프랑스 리옹에서 혼자 왔다는 한 여자는 한국말에 관심을 가지며, 한두 단어를 외우려고 연신 나에게 물어보며 되풀이했다. 

끝없이 펼쳐진 잉헤니오스의 사탕수수 농장은 온통 초록 들판이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모르겠는데, 좋은 카메라로 쉼없이 셔터를 누르는 혼자 온 남자가 눈에 띄었다. 심지어 나까지 찍으면서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이 남자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나중에 다른 도시에서 다시 만나며 그때 친해졌다. 요트여행을 하는 프랑스 가족은 다신 못 만났지만, 이 남자는 버스로 이동하는 나와 비슷한 루트였는지 버스에서 만났다. 사진 찍는 걸 그냥 좋아하는 배낭 여행객이었다.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영어까지 완벽하게 구사하는 그 남자는 이탈리아 사람이었다. 여행 이야기로 이어지는 대화는 끝이 없다.

느리게 가는 기차는 사진찍기에도, 경치를 감상하기에도 좋다.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집에서는 꼬마 아이가 나와서 손을 흔들어 준다. 초록빛으로 둘러싸이니 시야가 넓어져 저 멀리까지도 보인다. 하늘의 구름은 점점 피어올라 멋스러워진다. 점심 시간에는 다른 마을에 내려줬다. 간단하게 식사를 할 수 있는 작은 농장이다. 말도 키우고, 토끼도 키우고, 망고나무도 많았다. 사람들이랑 같이 점심을 먹고 또 슬슬 출발을 한다. 느리게 움직이는 쿠바 문화의 정점이 이 기차다. 빨리 움직일 필요가 없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나의 사진을 배낭여행자가 찍어주었다.
오후에 기차역에 도착하니, 나를 기다리는 이가 있었다. 눈물 날 만큼 고맙고 감동적이다. ‘KOREA’라고 쓰고 집전화 모양을 그린 작은 종이를 들고 있는 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라시아’(Gracia: 고맙다는 뜻의 스페인어)를 그렇게 진실되게 말한 건 처음이다. ‘베소’(친한 사람들끼리 포옹을 하며 양볼에 쪽 소리를 내며 하는 인사법)를 몇번이고 하면서 한참을 웃었다.

그들의 따스한 마음이 나를 기분좋게 만들어 준다. 휴대전화를 찾아줘서 기분좋은 것보다는 기차역까지 와서 종이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내 마음을 푸근하게 해 준다. 기차에 있던 사람들도 찾을 줄 알았다며, 같이 기뻐해 줬다. 다시 그 자전거를 타고 온 나는 그에게 약간의 돈을 더 줬다. 이것밖에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미안했지만, 성의 표시는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후로 그는 이틀이나 일터에 나오지 않았다. 괜한 일을 한 건가 싶다가도 정말 약간의 웃돈을 준 것뿐이어서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 카사 주인에게 이 얘기를 해줬더니, 물건을 찾아준 건 당연하다고 했다. 쿠바 사람들은 그런 것을 훔쳐가지 않는다며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욕심 없이 그리고 느리게 사는 쿠바인들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이었다.

강주미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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