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니다드 외곽에 있는 기차역에는 증기기관차가 정말 있었다. 쿠바 사람들이 실제로 이용하는 기차는 증기기관차가 아니었다. 한 칸짜리 작은 기차는 전차에 가깝다. 옆 도시까지만 짧은 구간을 이동하는 그 차는 일반 쿠바인들이 많이 이용한다. 외국인이 타고 싶어 하는 증기기관차는 하루에 한 번 관광용으로만 운행한다. 내일 그 증기기관차를 타기로 하고, 오늘은 멈춰 있는 증기기관차를 구경만 했다. 지나가는 한 남자가 친절하게 내부도 구경시켜줬다. 예전에 이곳은 교통의 요지였을 것이고, 이 기차는 물자 운송 수단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기차역에 가야 했기 때문에 느긋하게 걸어 갈 수는 없었다. 자전거택시를 하나 잡아 타고 간다. 요금은 1000원 정도면 충분하다. 세 바퀴인 자전거택시는 뒷좌석을 2인용으로 만들었고, 햇빛 가리개도 있다. 다만 열심히 땀을 흘리며 페달을 밟아야 하는 운전사가 힘들 뿐이다. 기차역에 9시도 안 돼 도착하니, 9시10분에 표를 끊어 주겠단다. 기차역은 텅 비어 있었으나, 출발 시간이 되니 택시들이 외국인을 싣고 와 스무 명 남짓한 기차 좌석을 거의 다 채웠다. 기차를 타려고 할 때, 아차 싶었다. 휴대전화가 없었다. 통화는 별로 안 했지만, 동영상도 찍고 지도도 내려받아 사용하고 있었는데, 잃어버리니 아까웠다. 자전거택시를 탈 때 사진 찍어 놓은 게 있어서 다른 자전거 택시 운전사에게 보여줬다. 그는 누군지 안다며 자기가 가서 말해줄 테니, 걱정 말고 다녀 오라고 한다. 그 말을 믿고 간 건 아니지만, 이 기차를 놓칠 만큼 휴대전화가 중요하진 않았다.
트리니다드 기차역과 코코탁시. |
스페인 식민지 시절 거대한 사탕수수 농장으로 착취해 가며 떼돈을 벌던 곳이다. 지금은 수확하고 싶은 만큼만 사탕수수를 키우고 있어서 농장이 많이 없어졌다. 그 당시는 설탕이 금보다 비쌌기 때문에 노동자들에게 강제노역을 시켜가며 이 밭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했다. 그러다 보니, 노동자들을 감시하는 탑이 생겨났고 재산을 모은 부자가 생겨났다. 지금 그 탑은 관광객이 올라가서 거대했던 잉헤니오스를 바라보는 전망대로 쓰이고 있으며, 부자의 집은 박물관과 식당으로 쓰이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기차가 도착한 마을은 잉헤니오스는 아니고, ‘마나카 이스나가(Manaca iznaga)’라는 작은 마을로 잉헤니오스 농장 주인이 살던 마을이다. 그래서 이곳에 탑이 세워져 있고, 그곳에서 잉헤니오스 사탕수수 농장 전체를 감시할 수 있었다. 끔찍하게 여겨졌던 그 탑에 나도 올라가 봤다. 좁은 계단을 올라가면 층층마다 창문이 없는 문이 있어 경치를 감상하기에 좋았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노동자들을 감시하는 무서운 탑이었으리라. 마치 거대한 수용소의 감시탑처럼 느껴진다. 끝없이 펼쳐진 잉헤니오스 농장은 짙푸른 초록빛깔 평야다. 지금은 고요하고 평화롭기만 하다. 그 시절 그 사람들은 다 어디 있을까.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들을 감시하던 탑은 지금 전망대로 쓰인다. |
끝없이 펼쳐진 잉헤니오스의 사탕수수 농장은 온통 초록 들판이다. |
느리게 가는 기차는 사진찍기에도, 경치를 감상하기에도 좋다.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집에서는 꼬마 아이가 나와서 손을 흔들어 준다. 초록빛으로 둘러싸이니 시야가 넓어져 저 멀리까지도 보인다. 하늘의 구름은 점점 피어올라 멋스러워진다. 점심 시간에는 다른 마을에 내려줬다. 간단하게 식사를 할 수 있는 작은 농장이다. 말도 키우고, 토끼도 키우고, 망고나무도 많았다. 사람들이랑 같이 점심을 먹고 또 슬슬 출발을 한다. 느리게 움직이는 쿠바 문화의 정점이 이 기차다. 빨리 움직일 필요가 없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나의 사진을 배낭여행자가 찍어주었다. |
그들의 따스한 마음이 나를 기분좋게 만들어 준다. 휴대전화를 찾아줘서 기분좋은 것보다는 기차역까지 와서 종이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내 마음을 푸근하게 해 준다. 기차에 있던 사람들도 찾을 줄 알았다며, 같이 기뻐해 줬다. 다시 그 자전거를 타고 온 나는 그에게 약간의 돈을 더 줬다. 이것밖에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미안했지만, 성의 표시는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후로 그는 이틀이나 일터에 나오지 않았다. 괜한 일을 한 건가 싶다가도 정말 약간의 웃돈을 준 것뿐이어서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 카사 주인에게 이 얘기를 해줬더니, 물건을 찾아준 건 당연하다고 했다. 쿠바 사람들은 그런 것을 훔쳐가지 않는다며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욕심 없이 그리고 느리게 사는 쿠바인들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이었다.
강주미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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