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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푼수가 그리운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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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4-04 20:51:20 수정 : 2014-04-04 20:5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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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보를 어리석음으로 여기는 세태
늘 뒷전서 돕던 여운 선생이 그리워
“그는 푼수다. 돈 많은 국회의원 친구하고 술을 마시고도 국회의원이 무슨 돈이 있느냐며 돈을 내주는 사람이다. 또 가난한 나라에서 온 후줄근한 모습의 화가를 술 마시다가 느닷없이 양복점으로 끌고 가 옷을 맞춰주기도 한다. 저는 언제 맞췄는지도 모를 오래된 양복을 걸치고 다니면서 말이다.”

신경림 선생이 여운 화백에 대해 쓴 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여운 선생은 지난해에 작고했다. 그가 먼 길을 떠난 지 벌써 일 년이 지났다.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렸던 그의 유작전도 지난 3월 25일에 끝났다.

여운 선생은 1980년대 문화운동의 큰 축이었던 민족미술인협회 창립을 주도했던 분이다. 엄혹했던 시절 그의 집은 수배 중인 이들이 몸을 숨겼던 곳이고, 미대 교수였던 그의 월급은 지인들의 옥바라지와 고달픈 후배들의 밥과 술을 위해 나갔다. 그러면서도 그는 빛나는 앞자리는 늘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뒷전에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고 자신을 위하지 않았다. 중국 루쉰대학에 교환교수로 갔다가 돌아오면서는 월급을 모두 그 대학에 기부하고 빈손이었다. 딸을 결혼시키면서 그렇게 많은 지인들에게 청첩장도 돌리지 않고 괜한 부담을 준다며 알리지 않았다.

국어사전을 보니, 푼수란 “생각이 모자라고 어리석은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라 한다. 여운 선생은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을 위해서는 참으로 생각이 모자라고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자신의 몫을 양보하고 다른 이를 위해 물러서는 것을 ‘어리석다’ 탓하는 요즘 세태로 보면 확실히 여운 선생은 푼수가 맞다. 어려운 후배들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자신의 부나 명예와는 하등 상관없는 일에 나서서 동분서주하는 것을 ‘생각이 모자라다’ 말한다면 그는 확실히 푼수다.

강태형 시인
재능이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화가이자 대학교수였고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운동에도 헌신했던 그가 어떤 자리에서든 소위 폼 잡는 모습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그는 늘 유쾌한 술꾼이었고 사람 좋아하는 푼수였다. 인사동 화랑가에 어둠이 내리면 바바리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뒷골목 술집을 전전했다 해서 ‘인사동 밤안개’라 불리던 그였다. 그는 재능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구분하지 않았고, 돈 있는 자와 없는 이를 구분하지 않았고, 권력 있는 자와 없는 사람을 구분하지 않았다. 다만 세상을 위해 좋은 뜻을 가진 사람과 좋은 심성을 가진 사람을 좋아했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무시하거나 핍박하는 사람을 미워했을 뿐이다. 그게 한 생애를 거니는 아름다운 푼수의 기준일지도 모른다.

그런 아름다운 푼수들이 한분 두분 세상을 떠나고 있다. 기억할 것은, 그런 아름다운 푼수들은 대부분 어려운 시절에 태어나 힘겹게 성장했던 분들이라는 사실이다.

어렵고 힘겨웠던 날들의 기억이, 제 입에 들어갈 한 숟가락 앞에서 그악스러움으로 드러날 것 같은데 오히려 다른 사람을 먼저 위하는 마음이 되는 아름다운 반전. 이게 세상의 희망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분명 어려운 시절이고, 어려운 시절은 그 안에 훗날의 아름다움을 잉태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화가 여운에 대해 간략하게 말하자면, 그는 1947년에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중에 지리산 자락에서 행방불명되었다. 아비의 기억이 없이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 홍익대에서 서양화를 공부했고 1970년 23세의 젊은 나이에 작품 ‘창’으로 한국미술대상전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이후 ‘동학’ ‘단절시대’ ‘세상굿’ 등 민화풍 그림과 ‘실향민’ ‘거리에서’ ‘먼 산 빈 산’ ‘곰나루 터’ 등 민중미술로 분류되는 탁월한 작품들을 남겼고, 2006년 ‘검은 소묘전’에서 선보인 ‘지리산’ 연작은 뛰어난 목탄화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여운 선생은 자신의 한 생애를 아름다운 작품으로 남긴 예술가다.

강태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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