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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진보 ‘서민주의’에 주목하라

입력 : 2014-04-11 19:43:27 수정 : 2014-04-11 19:4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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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진보의 위기’라는 말이 새삼 낯설지가 않다.

어느 순간부터 진보주의가 대중들로부터 조금씩 외면받고 있는 것이다.

공정한 분배를 통해 모든 구성원들의 생활수준 향상을 도모했던

진보주의에 정작 서민들이 눈을 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현실공산주의의 몰락을 지켜봤던 대중이

진보를 냉소하기 시작해서일 뿐일까.


크리스토퍼 래시 지음/ 이희재 옮김/ 휴머니스트/3만5000원
진보의 착각/크리스토퍼 래시 지음/ 이희재 옮김/ 휴머니스트/3만5000원


미국의 저명한 역사가이자 사회비평가 크리스토퍼 래시가 쓴 ‘진보의 착각’은 이에 대한 해답을 찾는 책이다. 1991년 쓰인 이 책은 소련의 붕괴 이후 본격화되기 시작한 미국 내 진보의 위기에 대한 해답을 보수주의의 위협 등 외부적인 것에서 찾지 않고 내부적 요인에서 찾아보려 했다. 이를 통해 내린 결론은 진보의 위기를 만들어낸 것이 사회 내부의 심리적·문화적·정신적 기초의 와해를 도외시한 ‘진보의 착각’ 때문이라는 것.

저자는 진보 역시 대량생산을 통해 생활수준을 계속해서 높일 수 있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우파와 차이가 없다고 판단했다. 좌우의 차이는 생산물 분배방식의 차이일 뿐 대량생산체제의 긍정에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래시는 유한한 지구가 인간의 무한한 욕망과 소비를 견뎌낼 수 없기 때문에 이 같은 꿈은 실현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참되고 오직 하나뿐인 천국(The true and only heaven)’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참되고 오직 하나뿐인 천국’은 이 책의 원제로 크리스토퍼 래시는 이 제목을 통해 무한한 발전만을 주창한 진보진영의 이념적 순결성과 엘리트주의를 꼬집는다.

대신 저자는 진보의 위기 극복을 위해 ‘한계의 인정’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평범한 이들’의 개별적 삶과 욕구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것.

책은 마틴 루서 킹의 흑인 민권운동을 주요한 사례로 거론하는데 그에 따르면 미국 남부에서 킹의 흑백 차별 철폐운동이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은 남부의 탄탄한 흑인공동체의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킹의 진보주의적 운동은 이 같은 공동체가 없이 전혀 다른 개별적 삶을 살고 있는 북부지역에도 그대로 적용됐고 결국 운동은 벽에 부딪혔다. 공동체의 보호를 받던 남부와 달리 공장 저임금 노동자로 혹사당하던 북부 흑인들은 원한에 사무쳐서 과격한 구호를 외쳤고 그 결과 민권운동에 공감했던 백인들마저 등을 돌렸다. 저자는 이 같은 분석을 통해 미래가 아니라 대중의 무지몽매함과 싸워온 미국 좌파 엘리트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20세기 중반 미국 내 대표적인 진보주의 민권운동인 흑백 차별 철폐운동을 이끌었던 마틴 루서 킹. 크리스토퍼 래시는 킹의 흑인민권운동이 남부와 달리 미국 북부에서 벽에 부딪친 것에 주목하며 진보주의가 좀더 평범한 이들의 개별적 삶과 욕구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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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대안으로 무너진 사회적·문화적 질서를 다시 세우는 일에 주목한다. 지금 진보 진영에 필요한 것은 이념적 순결성, 극단적인 냉소주의나 낙관주의가 아니라 노동의 즐거움, 안정된 관계, 가정생활, 향토애, 역사적 귀속감 등 무너진 정신적 가치를 재건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미 중서부 진보세력의 지식인 부모 밑에서 자랐기에 사회주의적인 성향을 지녔지만, 또 한편 독실한 기독교인이기도 했던 저자의 면모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서민주의(populism)’를 주창한다. ‘populism’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한국에서는 주로 부정적 의미로 쓰이지만 이 책은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저자가 생각하는 진정한 서민주의는 한 뼘의 땅, 작은 가게 등 최소한의 생산수단과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데 필요한 기술의 소유에 만족하며 인생을 긍정하고 살아가는 작은 영웅들의 삶을 말한다.

이 개념은 19세기의 노동운동에서 착안한 것으로, 래시는 당시 ‘생산하는 계급들’의 단결을 염두에 두고 협동조합을 통해 노동자가 생산을 다시 장악하려 했던 시도들에서 희망을 찾는다.

책은 이러한 관점 하에서 지금까지 역사학·정치학·사회학에서 다룬 진보 개념을 점검하고, 진보라는 이념적 경계 너머에 우리가 간과하고 오독하고 있는 공화주의와 기독교 전통 등 다양한 이론과 가치관을 재조명한다. 19세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진보에 관한 논쟁을 이끌어온 주요 비평가들과 그 사상적 배경을 다양한 시각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한 방대한 저작으로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지 않더라도 역사서를 읽는 마음으로 접하기에도 좋다.

서필웅 기자 seose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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