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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딸깍발이 청빈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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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8-27 21:31:17 수정 : 2014-08-27 21: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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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1363∼1452)는 영의정을 지내면서도 누옥과 관복 한 벌로 지냈다. 세종이 보다 못해 “일국의 영상이 단벌로 겨울을 나서는 안 된다”며 비단 10필을 하사하려 했다. 황희는 손사래를 쳤다. 백성이 흉년으로 헐벗고 굶주리는데 영상으로서 비단옷을 걸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크게 감동한 세종은 황희를 18년간 곁에 두고 중용했다. 황희가 조선 제1의 청백리로 꼽히는 이유를 알 수 있게 하는 일화다.

병조판서로 타계한 이이(1536∼1584) 집에는 장례를 치를 식량이 없었고, 임진왜란 당시 명재상 유성룡(1542∼1607)이 퇴직해 낙향하니 양식거리가 없었다고 한다.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여섯 번이나 영의정을 지낸 이원익(1547∼1634)은 비가 새는 초가집에서 떨어진 갓을 쓰고 생활했다.

오늘날에도 청백리의 맥은 이어진다.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은 친구 아들이 낚시로 잡아 선물한 잉어 다섯 마리조차 되돌려 보낼 정도로 청렴했다. 청백리의 삶은 고단하다. 무엇보다 물욕은 견디기 힘든 유혹이다. 청백리로 박수를 받다가 결국 초심을 잃어 명예에 금이 간 이가 어디 한둘인가. 안대희, 김능환 전 대법관은 그 생생한 증거다. 법조계 재산신고액 최하위를 기록했던 안 전 대법관이 변호사 개업 5개월 만에 16억원을 벌지 않았다면, 김 전 대법관이 ‘편의점 아저씨’ 생활 5개월 만에 억대 연봉의 로펌으로 가지 않았다면 그들은 훗날 교과서에도 나올 만한 ‘현대판 청백리’로 남았을 터이다.

‘딸깍발이 청빈 판사’ 조무제 전 대법관의 조용한 행보가 또다시 감동을 준다. 2009년부터 부산법원조정센터 상임조정위원장을 맡아온 그가 지난 6월 환송식도 없이 퇴임했다고 한다. 법원 내 성금 모금행사 때마다 익명으로 100여만원씩 기부한 일도 뒤늦게 드러났다.

그는 2004년 대법관 퇴임 때까지 25평짜리 전세 아파트에서 살았다. 법복을 벗은 뒤에도 연봉 수억원의 전관예우형 변호사 개업을 거부하고 모교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청렴과 나눔. 그의 삶을 설명하는 키워드다. 조무제 주연의 감동 시리즈는 삶의 무게에 지친 국민들의 마음에 힐링을 선사하고 의미 있는 삶을 생각하게 한다. 조 전 대법관 같은 이가 있어 우리 사회와 법조계의 품격은 이 정도라도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김환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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