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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르익어 가는 가을 도심 곳곳에서 은행 대란이 벌어졌다. 가로수 은행나무 열매가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는 기름에 볶은 다음 꼬치에 세 알씩 꽂고 끝에 잣을 박아 한 알씩 빼먹는 술안주로만 알았는데 땅에 떨어지니 딴판이다. 발길에 이리저리 차이고 밟혀 터지고 깨지니 고약한 냄새나 풍기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 대기정화 능력이 뛰어나고 단풍이 좋다는 이유로 플라타너스 포플러 벚나무 느티나무 무궁화 대신 길거리 가로수로 심어놓고는 이제와 ‘악취’ 운운하는 것도 모자라 ‘중금속 덩어리’ 오명까지 뒤집어씌워 쫓아내려 하고 있다. 은행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은행인데 사람 욕심이 ‘몹쓸 은행’으로 바꿔놓았다.

올해는 계절이 오고 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보냈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봄은 오는가 싶더니 언제 갔는지도 모르게 지나갔다. 계절의 제왕인 가을은 오는 줄도 몰랐다. 코스모스, 국화, 단풍, 높은 하늘, 풀벌레 소리로 안다는데, 눈과 귀가 딴짓을 하고 있었나 보다. 다행히 코란 놈만 정신 바짝 차리고 있었는지 진동하는 은행 냄새를 맡고서야 가까스로 가을이 온 줄을 알았다. 참으로 딱한 처지다. 상처를 내고, 아물지도 않았는데 또 헤집는 다사다난(多事多難)이 끊이지 않은 탓이다.

가을은 마음에서 온다는 얘기가 맞는 것 같다. ‘아무리 단풍이 요란스럽게 들고, 텃밭에 감이 빨갛게 익는다 해도, 우리가 아… 가을이구나! 하고, 마음속에 느낄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박정덕의 ‘안경 쓴 잉꼬’ 중에서)라고 했다. 혹시 따뜻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어 온 세상의 가을을 느낄 수 있는 이가 있다면 가을 햇살 내리쬐는 들녘에서 부지런히 손 놀리는 여염집 처녀에게서 가을의 정취를 맛볼 수도 있겠다. ‘봄볕은 며느리를 쬐이고 가을볕은 딸을 쬐인다’는 속담도 있지 않던가.

공원 산책을 나섰는데 한 건장한 청년이 연신 작대기를 던져 도토리를 떨어뜨리면 두 아주머니가 주워 봉지에 담는다. “따지 마시라”고 했더니 입은 “네” 하는데 손은 좀처럼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다람쥐가 겨울나기할 먹이까지 쓸어담는 인심이 야박하다. 소행이 괘씸해서 저만치 자전거 타고 지나가는 공원 관리인에게 고자질했다. 등산객 행렬이 가을 색깔만큼이나 울긋불긋하다. 산에 가려거든 단풍에만 취하지 말고 월동 준비하는 친구들에게 먹이 한 주먹이라도 던져주고 오면 좋겠다.

김기홍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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