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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유물에 깃든 패자의 역사

입력 : 2014-12-19 19:54:15 수정 : 2014-12-19 19:5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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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변방·잊혀진 민족·국가 이야기에 귀기울이다
닐 맥그리거 지음/강미경 옮김/다산초당/4만8000원
100대 유물로 보는 세계사/닐 맥그리거 지음/강미경 옮김/다산초당/4만8000원


“유물이 전하는 숨겨진 진실을 얻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시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저자는 대영박물관 관장이다. 유물 감상이라면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을 그가 유물을 제대로 보기 위해 ‘시인의 자질’을 권하는 이유는 뭘까.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 사용했던 방패
방패가 하나 있다. 불그죽죽한 색에 높이 1m, 너비는 30㎝의 크기다. 중앙에 구멍이 있고, 표면에는 긁힌 자국이 많다. 흰색 고령토를 재료로 한 물감 자국도 발견됐다. 방패의 주인은 6만여년 전부터 오스트레일리아에 살았던 원주민. 18세기 말 원주민은 바다를 건너온 영국인을 지금의 시드니 인근에서 처음 만났고, 양쪽의 충돌 때 방패를 사용했다. 1770년 4월 29일 방패는 영국으로 옮겨졌다.

방패가 전하는 역사를 유추하기 위해 이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중앙의 구멍, 긁힌 자국의 의미부터다. 부족 간에 죽기살기로 벌인 전투의 흔적일 것이다. 물감 자국은 좀 어렵다. 방패에 그려넣었던 어떤 표지나 상징일 수 있다. “주변 부족들 사이에서 그 사람(방패의 주인)이 속한 위치가 어디인지, 자기 부족 안에서 어떤 위치인지를 나타내는 역할도 했을 것”이다.

방패에 깃든 원주민의 역사를 파악하기 위한 상상이 이어진다. 물론 터무니없는 상상이 아니다. 합리적인 추측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세계 각국의 화려한 유물을 소장한 박물관의 관장이 초라해 보이기까지 하는 원주민의 방패를 ‘100대 유물’의 하나로 꼽은 건 ‘역사 속 패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페루에서 기원전 200년쯤부터 800년간 유지된 모치카 문명의 전사 모양 항아리. 세계사의 변방, 혹은 지금은 사라진 민족, 국가의 역사는 유물을 통해서만 전해지는 경우도 많다
“역사는 승자가 기록하며, 승자만이 글을 쓸 줄 알 때는 특히 더 그렇다. 패배한 이들, 곧 정복당하거나 파괴당한 사회에 속한 사람들은 오로지 물건을 통해서만 자기네 사연을 전할 뿐이다.”

책은 대영박물관 소장품 100개를 꼽아 인류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저자의 시선은 세계사의 변방이었던, 혹은 이제는 잊혀진 민족, 국가에까지 닿는다. 페루에서 기원전 200년쯤부터 650년까지 800년 넘게 유지된 모치카 문명의 전사 항아리도 이런 범주에 든다.

유물에 깃든 중첩된 역사를 읽어내기도 한다. 수단에서 19세기 말에 만들어진 슬릿 드럼에는 아프리카의 토착문화, 동아프리카의 노예무역, 아프리카를 두고 벌어진 유럽 열강의 이전투구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19세기 말 만들어진 수단의 슬릿 드럼. 아프리카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것이었지만, 이슬람의 도안과 영국의 왕관이 새겨지면서 제작 당시에는 생각조차 못했던 이력을 가지게 됐다.
다산초당 제공
슬릿 드럼은 공동체의 행사 때 연주됐던 것이다. 수단에 노예 사냥꾼이 침투하면서 슬릿 드럼은 이슬람 지역으로 흘러들어갔고, 악마를 경계하는 의미를 가진 이슬람 도안이 새겨졌다. 유물은 19세기 아프리카에서 세력 확대를 꾀하던 영국으로 넘어간다. 영국의 장군은 왕관을 새겨 빅토리아 여왕에게 바쳤다. 슬릿 드럼이 처음 만들어질 때는 상상조차 못했던 이력이 시간이 흐르면서 더해진 것이다.

저자는 대영박물관이 소장한 세계 각국, 각 민족의 유물 중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물건” 100개를 선택해 세계사를 풀어놓는다. “유물은 개별적인 사건보다 전체 사회와 복합적인 과정에 대해 말한다. 또한 그것을 맨 처음 만든 사회뿐 아니라 나중에 유물을 다른 형태로 고쳐 만들거나 다른 곳으로 이동시킨 시대를 말해준다”고 적었다. 그가 들려주는 가장 오래된 이야기는 탄자니아 올두바이 협곡에서 발견된 석기에 깃들어 있다.

석기는 인류가 “두드러지게 총명해진 순간을 대변”하는 200만년 전의 것이다. 마지막 100번째 유물로 꼽은 것은 2010년 중국에서 생산한 발전기다. “전선망에 의존하지 않고도 16억 인구에게 지구촌 대화에 합류할 수 있는 동력을 공급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붙였다.

7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지만 유물 각각에 깃든 역사를 설명하는 저자의 글이 친절하고, 유물 사진도 많이 넣어 쉽게 읽힌다. 차례대로 읽도록 구성했지만, 취향과 관심에 따라 순서를 바꿔 읽어도 좋을 것 같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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