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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재건 위해 마구 찍어낸 당백전… 가치 뚝 떨어져 ‘땡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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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12-21 21:26:52 수정 : 2014-12-21 21:2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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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만史설문] 〈43〉 엽전·땡전 등 동전의 속칭 엽전(葉錢)을 ‘우리나라 사람이 스스로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사전은 새기고 있다. “여긴 한국사람 상대하는 술집이 아냐. 엽전들은 들어올 수 없게 돼 있다고”라는 예문도 있다. 작고(作故) 작가 최인호의 ‘지구인’이라는 소설의 한 대목이란다.

‘둥글 납작, 가운데 네모난 구멍이 있는 놋쇠 등으로 만든 옛날 돈’이라는 1번 설명 다음 2번 설명이다. 이런 대단한 의미까지 부여한 사전도 있다. ‘봉건적(封建的) 인습(因襲)에서 탈피(脫皮)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사람이 스스로를 낮게 일컫는 말’이라는 풀이를 말하는 것이다. 뭥미? 글이야, 쓰레기야?

엽전이 ‘우리’를 비하(卑下)하는 말이 된 시기나 까닭을 알 수 없다. 그렇게 생긴 동전(銅錢)을 엽전이라 한다면, 우리보다 먼저 그걸 만들어 쓴 중국사람들도 다 엽전이게? 일본사람들은 또 뭔데? 그 시기 사람들의 ‘국제화 지수(指數)’가 낮았던 것으로 이해하면 될까?

우리나라 역사상 ‘대표 동전’인 조선시대의 상평통보.
상평통보(常平通寶)가 처음 사용된 것이 1634년 12월 20일(조선 인조 12년)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인구 증가에 따라 생산력이 커지면서 ‘돈’의 유통이 필요해졌다. 곧 사용이 중단됐다가 한참 후인 숙종 4년(1678) 다시 등장한다. 이후 우리나라의 ‘대표 동전’이 된다.

엽(葉)은 나뭇잎이다. ‘나뭇잎 모양’이라서? 박물관에서 보는 동전은 그렇지 않던데. 이는 동전 만드는 거푸집에서 막 떼어낸 주물(鑄物)이 나뭇가지에 잎 달린 모습을 연상케 한 데서 생긴 이름이다. 한 번 쇳물을 부어 여러 개를 만들었다. 떼어내 표면을 갈아낸 것이 동전이다.

동전을 이르는 속칭(俗稱) 중에는 ‘땡전’도 있다. “땡전 한 푼도 없다”와 같이 쓴다. 사전은 ‘~錢:아주 적은 돈을 이르는 말’이라고 풀었다. 이 말의 유래는 두 갈래로 나뉜다. 주로 인용되는 학설(?)은 당백전(當百錢)의 발음이 그렇게 변한 것이라는 추측에 기초한 것이다.

당백전은 당시까지 유통되던 상평통보의 100배 가치를 가진 동전으로 만들어졌으나, 유통 과정에 문제가 많았다. 우측에서 좌측으로 ‘당백(當百)’ 글자가 새겨졌다.
고종 3년(1886)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짓기 위한 경비를 마련하고자 만들어 유통시킨 돈이 당백전이다. ‘당’자 보고 ‘당나라’ 연상하는 것은 얼뜨기 생각이다. 일당백(一當百), 즉 한 사람이 백 사람을 감당할 수 있다는 말과 같은 ‘당’이다. 100배 가치(당시 동전 100개)의 돈인 것이다.

당시 실세(實勢)인 대원군의 무리수였다. 요즘 식으로 인플레 정책이다. 나라의 창고 상태도 헤아리지 않고 돈을 찍어냈다. 당연히 그 가치가 왕창 떨어졌다. 조롱하듯 당백전의 ‘당’을 되게 발음해 ‘땅전’이라고 했다가 ‘땡전’이 된 것 이라고 한다.

조선 제26대 임금 고종의 즉위 30주년을 기념해 1892년 경복궁 근정전에서 열렸던 진찬연(進饍宴)을 재연하는 모습. 그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이 경복궁을 재건하려고 무리하게 당백전을 만들었다. 당시 동전 만들 구리를 확보하기 위해 속리산 법주사의 거대한 청동불상까지 희생됐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다른 ‘학설’은 제작 과정이나 유통 중에 깨지는 등 손상된 것을 땜질한 돈이라서 ‘땜전’이라 했던 것이 ‘땡전’이 됐다는 것이다. 값이 만만치 않은 구리 합금(合金) 재료인 데다 만드는 품도 꽤 들고, 당시 동전의 품질이 오늘날만큼 안정적이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망가진 것도 재활용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기는 하겠다. 그럴싸한가?

상평통보의 상평은 상시(常時) 평준(平準)을 합쳐 줄인 말이다. 항상 고르고 평평한 가치를 가지고 통용(通用)되는 화폐[보(寶)]를 만들겠다는 나라의 염원을 담은 말이겠다.

둥글고[원형(圓形)] 납작하며 가운데 네모 구멍[방공(方孔)]이 뚫린 모양은 중국의 동전을 따른 것이다. 중국을 통일한 진(秦)나라가 주조(鑄造)한 반량전(半兩錢)이 원형방공전(圓形方孔錢)의 효시다. 이후 한국과 일본에까지 이 형태가 퍼져 동아시아 동전의 기본형이 됐다.

동전 제조 과정 모형 중의 한 부분. 주형(鑄型) 즉 거푸집에서 떼어낸 주물이 나뭇가지와 이파리 같다. 동전을 엽전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대전 화폐박물관 제공
‘국순전(麴醇傳)’으로 잘 알려진 고려 문인 임춘(林椿)의 이야기책 ‘공방전(孔方傳)’은 그 이름 원형방공전과 관련 있다. 구멍이 모난 물건 즉 돈을 주제로 한 이야기다. 둥글다는 뜻 ‘원형’을 떼고 ‘방공’(方孔) 또는 ‘공방’(孔方)을 돈의 대명사처럼 쓰기도 했다.

이 ‘공방전’에 대해 공(孔)은 둥근 것이고 방(方)은 네모(구멍)라,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옛 우주관이 스민 것이 돈이라고 ‘썰’을 푼 책들도 있다. 우주적인 돈일세. ‘하늘은 둥글고[圓] 땅은 모나다[方]’는 여씨춘추(呂氏春秋) 한 대목의 패러디로 보인다. 그러나 공(孔)은 단지 구멍일 뿐, 둥글다는 뜻이 아니다. 재주 있는 글 솜씨이긴 하다. 그러나 재주는 무식을 덮을 수 없다.

글 배운 사람은 자기가 모르는 말을 써서는 안 된다. 남을 속이는 짓이다. 문자와 역사의 맥락(脈絡·context)에 어두운, 이런 사이비 글쟁이들의 ‘학설’은 곳곳이 지뢰밭일 터, 당초 믿지 않는 게 낫다. 이런 ‘엉터리 학설’들이 요즘 점점 많아진다. ‘엽전사회’여서? 왜 그렇지?

강상헌 평론가·우리글진흥원장 kangshbada@naver.com

■사족(蛇足)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Bad money drives out good money.) 그레샴의 법칙으로 불리는 이 문장은 꽤 자주 인용된다. 간혹 ‘매우 존엄한 뜻’을 품은 경구(警句)처럼 활용되기도 한다. ‘나쁜 돈이 좋은 돈을 몰아낸다’는 뜻. 그레샴은 16세기 영국의 금융업자다.

당시에는 중요한 개념이었다. 같은 액수(액면가)의 동전을 같은 무게의 금과 구리로 만들어 유통시킨다면, 금화(양화) 대신 싼 구리 돈(악화)만 유통될 것이다. 금화는 당연히 집에 숨겨야(보관해야) 한다. 구리 돈이 금화를 몰아낸다. 첨단 금융시대인 지금은 설명하기도 어색하다. 당백전이 이 ‘나쁜 돈’의 표본이겠다.

이 내용을 알면 숱한 ‘그레샴의 법칙’의 인용들이 무참해진다. 그 문장에 ‘뭔가’ 있으리라고 착각한 사람들이 자기 글에 무심코 인용하는 것이다. 신문 글을 관찰하니 그 인용의 거의 대부분이 단순히 ‘나쁜 놈 때문에 좋은 놈이 피해를 입는다’는 비유로 쓴 경우다. 원래의 뜻도 그런 의미와 차이가 있지만, ‘나쁜 놈이 좋은 놈을 몰아낸다’는 말(뜻)이 일반적인 법칙이 되는 것은 부적절하다. 꼭 이 말을 쓰고 싶다면 원래의 경제(학)적 의미를 알고, 자신의 의도와 같은지 확인해야 한다. 활용하기 어려운, 무식이 탄로 나기 쉬운, 위험한 개념인 것이다. 그리 궁리를 많이 해야 한다면, 차라리 안 쓰는 것이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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