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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호국인물 서일 총재, 6.25 영웅 한정일 경감 선정

입력 : 2015-02-27 10:13:06 수정 : 2015-02-27 10: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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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일 경감.

전쟁기념관과 국가보훈처는 일제강점기 만주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다가 순국한 서일(1881.2∼1921.8) 독립군 총재와 6.25전쟁 곡성전투경찰대를 편성해 북한군과 유격전을 펼친 한정일 경감을 각각 ‘3월의 호국인물’과 ‘3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27일 밝혔다.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어난 서일 선생은 1910년 동만주로 망명해 청일학교와 명동중학교를 설립, 한인 자녀를 교육했다. 대종교에 입교해 만주로 들어오는 망명 의병을 규합해 독립군인 중광단을 조직하고 단장을 맡았다.

1918년 만주와 러시아령에 있는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독립전쟁으로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취지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이듬해 중광단을 정의단으로 개편하고 체코군의 도움으로 무기를 구입해 독립군으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이후 정의단을 무장독립군단을 보유한 항일단체이자 북간도 전 지역을 행정구역으로 삼는 행정부를 겸비한 군정부로 재편성했다.

군사훈련과 무기구입 등의 활동을 벌이던 중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계해 군정부를 대한군정서로 개칭하면서 총재에 취임했다.

1920년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후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 서로군정서군, 안무군, 광복단 등의 여러 부대를 통합해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총재가 됐다.

1921년 8월 수백 명의 도적에게 야습을 받고 다음날 독립군 지휘자로서 책임을 통감해 자결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한정일 경감은 1950년 6.25전쟁으로 광주, 순천, 광양이 함락되던 무렵 곡성경찰서장을 맡고 있었다. 한 경감은 주민을 버리고 철수할 수 없다는 각오로 곡성전투경찰대를 조직했다.

그해 7월24일 경찰과 의용대원 중 자원자를 중심으로 520명을 인솔해 곡성 인근 산악지대에 배치했다.

나흘 뒤 생포한 북한군으로부터 순천에 진입한 북한군 제6사단 603기갑연대가 남원으로 이동하려고 7월 29일 섬진강 상류의 압록교를 통과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다.

한 경감은 매복 작전을 펼쳐 북한군에 기습 공격을 감행해 52명을 사살했다. 타격을 입은 북한군이 다시 압록교를 넘기까지는 일주일이 더 필요했다.

8월6일 새벽 북한군 1개 연대의 기습 반격으로 태안사에서 48명의 경찰관이 전사하고 200여 명이 부상당했다. 전남 광양 백운산으로 철수한 한 경감은 잔여 대원들을 중심으로 전열을 정비하고 북한군의 보급로를 기습하는 등 유격전을 지속했다.

보훈처는 “곡성전투경찰대는 조직력을 갖추고 자발적으로 적진에 남아 유격전을 전개했으며 압록교 전투를 대표적인 경찰 승전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선정 배경을 설명했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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