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여백마저 비워낸 ‘無心의 캔버스’

입력 : 2015-03-10 20:22:13 수정 : 2015-03-10 20:22:13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원로 작가 2人 ‘비움과 체념’을 그리다 한국 단색화의 대표 작가인 박서보(84)는 지금도 1967년 어느날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머리를 점령해 가고 있는 많은 예술사조들을 비워내지 않고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절박함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방법론을 찾지 못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둘째아이가 형 공책에 글씨를 써 내려가는 모습이었다. 글씨는 칸 밖으로 이리 삐죽 저리 빼죽 얼굴을 내밀었다. 글씨가 네모 안의 틀을 벗어 나니, 아이가 지우개로 지우고 쓰기를 반목했다. 공책은 구멍이 났다. 아이는 이내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연필로 쓱쓱 여러 번 그어버렸다. 박 화백은 그 광경에서 체념과 비움을 봤다. 박서보의 ‘묘법’(描法·ecriture) 시리즈가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최병소 작가·박서보 작가
신문이나 신문용지에 연필이나 볼펜을 반복적으로 그어 활자와 여백을 아예 덮어버리는 최병소(72) 작가의 작업도 무심함에서 오는 체념이다. 뭔가를 채워가는 것 같지만 실상은 글자와 여백마저도 비워내고 있는 것이다. 바탕이 신문지였는지조차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그도 자신만의 방법을 찾다가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신문과 볼펜, 연필에 주목하게 됐다.

비움과 체념의 미학을 보여주는 두 작가의 전시가 동시에 열리고 있다. 박서보는 1996∼2001년 제작한 ‘묘법’ 시리즈와 이것의 바탕이 된 ‘에스키스(esquisse) 드로잉’을 31일까지 서울 인사동 노화랑에서 보여준다. 에스키스 드로잉은 작업을 하기 위한 아이디어 스케치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아이디어를 표현하고자 필요한 부분의 상하좌우에 몇㎝ 간격이 필요하다는 수치가 단정하게 쓰여 있고 선과 면의 구분도 보인다. 

박서보의 에스키스 드로잉 ‘묘법 no.000729’. 작가의 아이디어를 적절히 표현하고자 건축 설계도처럼 간격의 수치까지 쓰여 있다.
박서보는 한때 연필과 종이만 가지고 사찰 선방에 들어가 참선하듯 이미지 드로잉을 채집하기도 했다.

“무릎을 꿇고 연필을 잡은 손을 종이 위에 내리치면 울림 자체가 드로잉이 됩니다. 때론 그때그때 무심한 생각들을 메모해 활용하기도 합니다.”

그는 아파트 거실에서 내려다 보았던 한강다리 야경과 아내와 여행하며 봤던 제주도 풍경도 몸속에서 세탁해 풀어내기도 한다. 일종의 경치를 빌려오는 차경(借景)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신문용지를 화폭 삼은 최병소의 대형작품. 길이가 15m에 달해 전시장에 설치작품처럼 걸었다.
최병소는 4월26일까지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그가 볼펜과 연필로 무심고 그어 나가는 작업을 시작한 것은 1975년도부터다.

“제게는 불심이 돈독하신 할머니가 계셨어요. 천리안이 열린 분이라 누가 어느 때에 온다는 것을 다 아셨던 분이지요. 할머니가 돌아가신 얼마 후에 버스를 타고 가다 차창 밖으로 할머니 모습이 보였어요. 버스에서 부리나케 뛰어 내려가 보니 할머니를 닮은 LP판 노점상이었지요. 천수다라니경 LP판이 눈에 들어와 저도 모르게 구입했습니다.”

그는 집에 돌아와 할머니 생각에 그 LP판 틀었다. 볼펜이 쥐어진 손이 무심히 신문지 위를 오갔다. 볼펜 작업은 그렇게 시작됐다.

“동굴벽화 시대에는 눈으로 본 그림을 그렸어요. 이후 사람들은 머리로 본 그림을 그렸고, 중세 신앙시대엔 가슴으로 본 그림을 그렸지요. 저는 온몸으로 그린다고 생각해요.”

그가 신문용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6·25전쟁 경험과 연관이 있다. 당시에는 교과서 출판도 열악한 상황이어서 정부는 신문용지에 내용을 인쇄해 배포했다고 한다. 학생들은 집에서 이것을 제본해 사용해야 했다. 신문용지는 그에게 세월만큼 친숙한 매체인 셈이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방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는 지우는 것처럼 맘 편한 게 없고 비우는 것처럼 홀가분한 게 없다고 했다.

“지우는 것은 생각을 비우는 것이며 생각 이전의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신문지 앞뒤를 모두 그어가다 보면 경계마저 모호해져요. 삶과 죽음조차도 하나인 편안한 세계에 이르는 것 같아요.”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한지민 '우아하게'
  • 한지민 '우아하게'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최지우 '여신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