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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된 작품 없이 해외작가와 교류는 유령 만나는 느낌”

입력 : 2015-04-13 20:47:46 수정 : 2015-04-14 16:2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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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나마스테!] 한·영 대역 ‘한국소설 110권’ 완간 방현석 작가 “번역된 작품도 없이 해외 작가들과 교류한다는 건 유령을 만나는 일과 같습니다. 설사 만나지 않더라도 작품을 읽어야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거죠. 이 기획은 사실 오래전부터 준비를 한 겁니다. ‘아시아’를 창간할 무렵부터 편집부에 제안했는데 엄두를 못 내고 미루다가 막무가내로 우겨서 첫 세트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소설가 방현석(54·중앙대 문예창작과 교수)씨가 한국 대표작가 110명의 단편소설을 영어로 번역해 한글과 나란히 실은 한영대역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대표소설’을 기획한 지 7년 만에 최근 완간했다. 그가 주간을 맡고 있는 ‘아시아’ 출판사에서 이루어낸 쾌거다. 문고판 사이즈로 한면에는 한글, 옆면에는 영어로 작품을 게재하고 말미에는 해설까지 두 언어로 나란히 실었다. 한국 사회의 내면을 읽어내는 ‘분단’ ‘산업화’ ‘여성’ ‘자유’ ‘전통’ ‘디아스포라’ ‘유머’ 등 22가지 주제별 키워드로 분류해 세트로 묶었다. 하버드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연구원이자 비교문학 박사인 전승희,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의 한국문학 교수 브루스 풀턴, 영국과 호주에서 활동 중인 번역가 아그니타 테넌트와 손석주 등 한국문학 번역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아마존에서 전자책으로도 판매할 예정이다. 세계 어디에서든 실시간으로 한국 문학을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국 대표작가 110명의 단편을 한영 대역판으로 7년 만에 완간한 소설가 방현석. 그는 “견디다 보면 어떤 모욕도 시간 앞에 진실을 드러내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작은 출판사에서 당장 수익이 확보되지 않는 기획을 밀어붙여 완성시킨 건 크게 평가할 만한 일이다. 들어간 비용만 권당 500만원 이상이니 얼추 계산해도 5억원 넘게 투자된 셈이다. 요즈음이야 한국 문학이 불황의 늪에 빠져 어렵다는 하소연이 여기저기서 들리지만 그동안 대형 문학출판사들이 작가들 덕분에 이익을 누려왔음에도 그들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돌아볼 대목이다.

“2005년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 한국 초대작가 중 한 명으로 갔는데, 온전히 번역된 책도 없이 낭독회에 참석하자니 민망하고 창피하더군요. 한 글자도 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들 앞에서 낭독회를 하는 것 자체가 희극이었던 거지요. 작가라는 사람들이 언어로 현실 세계와 긴장 관계를 이루며 살아가는 건데 언어로 인해 오히려 희화되다니 얼마나 모순된 겁니까?”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 해외 작가들과 교류하더라도 정작 서로의 작품을 읽을 수 없다면 공허할 수밖에 없다. 근·현대를 망라해 한국 대표작가들 단편을 한영대역으로 아마존을 통해 유포하는 발상은 기동력이 담보되지 않으면 쉽지 않은 효율적이고 신선한 방식이다. 아시아 작가와 작품들을 영어와 한글로 소개하는 계간지 ‘아시아’를 9년째 주도해 온 방현석의 뚝심과 진정성의 승리라면 과도한 평일까.

“소설을 쓰면서 한 번도 울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나조차 울리지 못하는 소설이 어떻게 남들을 울릴 수 있겠습니까?”

11층 창문으로 비껴드는 석양 속에서 그가 소설 이야기로 접어들었을 때 던진 말이다. 그를 만난 곳은 중앙대 흑석동 캠퍼스 유니버시티클럽이었다. 그는 수업을 마친 뒤 바람 냄새를 몰고 뛰어 왔다. 일찍이 중학교 시절 씨름 선수로 발탁될 정도로 덩치가 큰 그이의 바탕에 소설처럼 따스한 감성이 흐르리라는 건 얼추 짐작하고 있었지만 작품을 쓸 때마다 우는 정도인지는 몰랐다. 씨름이란 ‘균형과 중심’의 운동인데 가만히 서 있을 때가 더 힘든 법이라고 그는 말했다. 굳건하게 중심을 땅바닥에 박지 않으면 상대방이 걷어차거나 살짝 밀기만 해도 쓰러진다고 했다. 인생도 중심을 잃으면 한 방에 무너지는 법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방현석은 4남매 중 막내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세 명의 누나 밑에 아들이라곤 혼자여서 충분히 사랑받고 자랐을 법하다. 짐작이 틀리진 않은 것 같다. 부친은 울산 농촌 마을에서 유일하게 신문을 구독하는, 특이하게도 경상도에서 김대중을 지지하는 야인이었다. 덕분에 방현석은 초등학교 중반 무렵에 벌써 한자투성이 신문을 열심히 읽었고, 이른바 ‘고전읽기대회’에 선수로 선발될 정도로 ‘삼국유사’와 ‘그리스신화’를 비롯한 다양한 책들을 섭렵할 기회를 가졌다. 씨름을 못마땅해한 아버지가 그를 중학시절 서울로 전학시켰고 경기고에 입학하면서는 서클활동을 하면서 선배들의 ‘인문 세례’를 일찍이 받았다. 철학과를 가려 했지만 여의치 않아 친구 따라 ‘문예창작과’에 지원한 것인데, 본고사에서 춘향의 애인 이도령의 이름을 ‘이방원’이라고 쓴 그를 두고 배꼽을 움켜잡고 웃던 친구는 정작 낙방하고 자신만 합격했다. 시로 응시한 실기 점수가 출중했던 덕분이었다는데 입학 후 복학생이던 소설가 송기원을 만나면서 시보다 소설 쪽으로 기울었고 운명적으로 그 길을 걸어왔다.

대학 1학년 때는 과대표로 1980년의 격렬한 정치적 지형을 통과했고, ‘징역 가기 싫어’ 서둘러 군대로 ‘도피’했지만 복학 후 다시 안성캠퍼스 학생회장으로 1년을 살아야 했다. 어쩔 수 없이 공개석상에서 해야 했던 ‘거룩한 말씀’들을 책임지기 위해 그는 1985년 겨울 노동현장으로 들어갔다. 이후 인천 지역에서 10년 동안 노동자로, 노조 간부로 살았다. 이 시절 이야기를 ‘내딛는 첫발은’이라는 단편소설에 담아 ‘실천문학’에 가서 당시 주간이던 송기원에게 넘겨주고 원고료와 맞바꾸면서 소설가로 데뷔했다.

“노동판에서 살던 그 시절이야말로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였습니다. 소설은 연휴 때나 쓰는 것이었고 혁명가의 정체성이 압도적이었지요. 살려고 몸부림치는 주변의 아름다운 사람들을 소설로 형상화했을 따름입니다. 그들 곁에서 살 수 있었던 건 내 인생의 행운이지요.”

이후로도 ‘새벽출정’ ‘내일을 여는 집’ 등을 해마다 발표하면서 노동문학 작가로 호가 붙은 그가 새롭게 한국 문단의 중심으로 업그레이드된 건 2003년이다. 그는 ‘존재의 형식’이라는 중편으로 황순원문학상과 오영수문학상을 받으며 그해 최고의 작가로 떠올랐다. 이 수상작은 여권 한 권을 도배할 정도로 베트남을 오가며 그곳 사람과 환경에서 위로를 구한 결실이었다. 노동판을 떠나 서울로 올라오면서 그는 소설가 김남일이 주축이 되어 만든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작가모임’에 들어가 베트남을 오가며 현대사의 아픔을 공유했다.

방현석은 2004년 중앙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임용된 이래 지난 10년간 ‘아시아’지와 기획시리즈를 발간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 단편 2편과 김근태의 삶을 다룬 픽션 같은 장편을 쓴 걸 제외하면 소설은 손에서 놓다시피 살아왔다. 그는 이제야말로 소설에 집중할 것이라며 흥미로운 자료도 확보해놓았다고 밝혔다. 말미에 그는 한국 문단이 그동안 독자들을 너무 많이 속여왔다고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름만 가리면 누구인지 모를 비슷비슷한 작품들이 범람하는, ‘문장기술자’들만 양산하는 환경이라고 했다. 작가라면 모름지기 한 세계를 감당할 만한 그릇이어야 하는데 그 기준보다는 문장력이나 가독성만 보고 신인들을 뽑다보니 이런 현실에 당도했다는 것이다. 소설의 동력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허접해진 현실’에서 ‘시간의 두께와 알리바이’를 언급하는 방현석의 이 발언, 위안이 되는가.

“인생은 1박2일이 아닙니다. 견디는 게 중요합니다. 모욕도 견디다 보면 결국 시간 앞에서 진실을 드러냅니다.”

글·사진=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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