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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토씨 하나 안 고치고… 보고 쓴 ‘저질 보고서’에 혈세가 샌다

입력 : 2015-05-25 06:00:00 수정 : 2015-05-25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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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중복게재 의심사례 최다 적발, 관행·동업자 의식에 윤리기준 느슨
해당 연구기관이 위반 여부 판단해… 실제 징계 이뤄지는 경우도 드물어
‘부정한 보고서’ 정책부실로 이어져 국가 신뢰도·경쟁력까지 악화 우려
국책연구기관들의 위조, 변조, 표절 등 연구윤리 위반이 심각한 수준으로 나타났다. 다른 사람의 논문을 토씨 하나 고치지 않고 표절하는가 하면, 영어로 된 논문을 번역해 자기 보고서인 양 제출하는 경우도 있다. 자기 보고서를 표절하거나 중복 게재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복제·표절 보고서 작성에 국민 혈세가 허투루 낭비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국책연구기관의 보고서는 정책의 골간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정책부실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윤리는 다른 어느 기관보다 엄격히 지켜져야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2005년 황우석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연구자의 부정행위가 개인뿐만 아니라 기관, 국가의 신뢰도와 경쟁력까지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연구윤리 준수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표절·중복게재 최다… ‘윤리 위에 관행’

경제·인문사회연구회(경사연)에 따르면 연구기관 평가에 처음으로 연구윤리 분야를 포함한 2013년 25개 연구기관 가운데 16곳이 E·F 등급을 맞았다. S등급부터 F등급까지 7단계로 나뉜 평가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게 고작 C등급이었다. 2013년 평가와 비교해 2014년에는 그나마 상황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낙제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14년 평가에서 F등급을 받은 연구기관은 과학기술정책연구원, 한국조세재정연구원, 한국행정연구원,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등 4곳이다. 국토연구원과 한국교통연구원, 한국노동연구원,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E등급을 받았고, 대외경제정책연구원, 한국법제연구원, 한국여성정책연구원,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건축도시공간연구소는 D등급을 받았다. 25개 연구기관 중 과학기술정책연구원, 한국행정연구원은 2년 연속 F등급을 받았다.

연구윤리 평가기준은 크게 여섯 가지로 나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위조(존재하지 않는 데이터 또는 연구결과 등을 허위로 만들어내는 행위) ▲변조(연구재료, 기기 등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거나 변형해 연구내용·결과를 왜곡하는 행위) ▲표절(타인의 저작물, 아이디어를 출처 표시 없이 자기 것처럼 사용하는 행위 등) ▲중복게재(자신이 이미 발표한 저작물과 동일 또는 유사한 저작물을 다시 발표하는 행위. 자기표절·이중게재 포함) ▲부당한 저자 표시(기여 없는 저자를 공동저자 또는 명예저자로 표시하는 행위) ▲기타(출처표시 누락 등) 등이다.

이들 평가기준 가운데 가장 빈번하게 적발되는 부분이 표절과 중복게재다. 2012년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정부예산이 들어간 75편의 기본연구과제 보고서에서 표절 의심사례 92건, 중복게재 의심사례 28건이 발견되기도 했다. 한 연구원은 “연구보고서를 작성할 때 관행적으로 이뤄지던 행위들이 연구윤리 위반사례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며 “특히 자기가 과거에 했던 연구 결과물에 대해서는 조금 안이하게 생각하고 처리할 때가 많은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연구기관이 위반 여부 판단… 솜방망이 징계


경사연은 연구기관 보고서에서 연구윤리 위반 의심 사례가 발견되면 평가와 별도로 해당 기관에 통보한다. 이렇게 통보된 보고서는 연구기관 자체 검증과정을 거쳐 위반 여부가 최종 판결되며, 해당 연구원에 대한 징계 수위도 결정된다. 하지만 이 같은 과정에서 실제 징계가 이뤄지는 경우는 드물다. 2012년 경사연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연구윤리 위반 의심 사례가 발견된 19개 기관 중 주의·경고를 내린 곳은 9곳에 불과했고, 나머지 10개 연구원은 별도의 징계가 없었다.

연구기관 평가에서 연구윤리 위반 의심 사례가 발견된다 하더라도 실제 해당기관에서 ‘위반하지 않았다’고 판단하면 사실상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다. 연구윤리 위반 여부의 최종 판단은 각 기관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이다. 대학교수의 연구논문 표절 시비가 불거질 때 해당 대학의 윤리위원회가 위반 여부를 판단하는 것과 같은 이유다.

하지만 이 같은 구조가 관행처럼 굳어지면서 연구윤리 의식을 오히려 떨어뜨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언제든지 같은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동업자 의식’과 다른 연구원의 논문에 대한 평가를 꺼리는 ‘불문율’이 연구윤리 기준을 느슨하게 만들고 있다는 분석이다.

또 연구기관의 실적이 예산에 반영되기 때문에 무리하게 보고서 건수만 강요하다 보면 보고서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 2008년 이후 23개 연구기관 현황을 살펴보면 전체 연구원 수는 매년 큰 차이가 없는 반면 보고서 건수는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그만큼 연구원 1인당 써야 할 보고서가 많다는 뜻이다.

한 대학교수는 “비정규직 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1년에 몇 편씩 연구보고서를 찍어내야 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며 “이런 상황에서 전문적인 양질의 보고서가 나오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세종=안용성 기자 ysah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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