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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나마스테!] "한국문학 살리기 위해서는 돈벌이와 문학 구별해야"

입력 : 2015-07-06 22:03:07 수정 : 2015-07-07 14:3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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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40주년 맞은 소설가 현기영 “이 사건이 망신스러운 것은 신경숙을 한국 대표작가로 만들어 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신경숙은 (특정 스타일로 쓰는) 한 분야의 작가일 뿐인데 마치 한국 모든 작가를 대표하는 것처럼 돼 버린 현실입니다. 출판사와 그 출판사 평론가들의 잘못이지요. 한국 대표작가가 일본 우익 대표작가 미시마 유키오를 표절했다고 알려진 건 국제적 망신입니다.”

이른바 신경숙 표절 파문 광풍이 조금 꺾인 지난 주말 서울 인사동 찻집에서 소설가 현기영(74)을 만났다. 올해 등단 40주년이기도 하고 이를 기념해 출판사 창비에서 중단편전집도 나왔다.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뒤 1978년 계간지 ‘창작과비평’에 중편 ‘순이 삼촌’을 발표한 이래 제주 ‘4·3’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참혹한 단면을 소설에 녹여 왔다. ‘창비’와 인연을 맺은 지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 그가 ‘고문’까지 맡고 있는 그 창비에서 낸 신경숙 소설이 표절 파문에 휩싸여 오욕의 시간을 통과해 왔으니 심정이 어떠할지 짐작이 간다. 그는 한 매체와 나누었던 전화인터뷰에서 “이번 사태로 속상하다 못해 뼈가 아프다”고 말했거니와 이날도 곤혹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야기(소설)가 시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면 그런 문학은 대중문학으로 분류하고 일찍이 창비가 버린 거시서사, 역사·정치·사회와 관계된 공동체 인간들의 삶을 다루는, 사회 배면의 심층을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문학을 격려하고 가꾸어야 될 것 아니냐, 시장주의로만 나가면 안 되지 않느냐고 말해 왔지만, 안 돼요. 주식회사는 이윤을 남겨야 한다는 겁니다.”

등단 40주년을 맞은 소설가 현기영. 그는 “나는 다시 젊음이고 싶고, 낡은 것이 새것이고 늙음이 새롭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서상배 선임기자
신경숙이 본격적으로 창비와 연을 맺은 건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외딴방’이 1996년 창비에서 주관하는 만해문학상을 수상하면서부터였다. 시골에서 올라와 산업체특별학교를 다니다 문예창작과에 들어가는 자전적 삶을 풀어낸 이 작품은 “미시서사가 집단적 기억으로 환원될 수 있음을 확인시켜” 새로운 리얼리즘의 가능성을 여는 작품으로 상찬을 받았다.

“그때 창비에서 시상식 축사를 부탁해 나이도 어리고 의외이기는 했지만 앞으로는 소녀적 감수성에서 벗어나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중후한 세계로 가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이후로도 신경숙이 소녀적 감수성과 센티멘털리즘에 영합하는 소설을 계속 썼는데 그걸 경고했던 겁니다. 이즈음 한국문학은 창비나 문학동네나 문학과지성에서 출간하는 작품들이 거의 구별이 안 돼요. 한결같이 개인의 일상이나 겨우 나아가면 가족문제 정도의 미시서사만을 옹호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창비가 신경숙을 영입해 ‘상업적으로’ 성공했을지는 모르지만 ‘문학’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문제는 리얼리즘이었다.

“사실 시장에 저항하는 것은 리얼리즘입니다. 모든 가치가 시장에 의해 결정돼 버리는 세상에서 그게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건 리얼리즘 문학밖에 없습니다. 돈벌이와 문학을 구분해 달라고 했는데 항상 베스트셀러가 있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유가 생겨도 좋은 데 쓸 생각을 못합니다.”

리얼리즘, 혹은 민족문학이란 창비가 주축이 되어 1980년대 문학의 헤게모니를 쥐었던 장르이다. 1990년대로 접어들어 이른바 ‘공동체 서사’에서 급격하게 개인의 일상을 다루는 ‘미시서사’로 관심이 옮겨가면서 창비 또한 ‘신경숙’으로 상징되는 미시서사의 스타를 영입했다는 것이다. 이후 창비가 ‘리얼리즘’을 홀대하고 대세를 좇아 신경숙과 함께 작금 사태에 봉착했다는 생각이다.

“아름다운 문장은 수단이지 목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후배들 중에는 유머도 그 어떤 것에 도달하는 수단이어야 하는데 목적인 경우가 보여요. 문학이 왜소해져서는 안 됩니다. 소위 일상생활을 기반으로 하는 미시소설이 지금 대세인데 그중 좋은 작품을 선택하는 것을 문학권력이라고 이야기하는 건 곤란합니다. 예쁜 미시서사 바깥의 투박하면서도 감동적인 리얼리즘은 투고해도 받아들이지 않는 걸 권력의 남용으로 보면 모를까.”

굳이 ‘같은 밥 같은 나물’들을 두고 다투는 ‘문학권력’에 대해 현기영은 냉소적인 편이다. 어떤 작품을 선택하든 배제된 자들이 절대다수일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 싹트는 불만과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치열한 논란은 쉬 잠재울 수 없다. 더욱이 그 과정이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때 신경숙 사태 같은 계기를 만나 치솟는 분노는 뜨거울 수밖에 없다. 이 차원을 넘어서서 현기영은 작금 한국문학의 근본 형질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리얼리즘은 유신 치하와 군부독재시절 민주화투쟁을 거치면서 당위의 문학으로 위세를 떨쳐 딱딱한 이데올로기적인 장르로 대중에게 인식된 측면도 부인할 수 없다. 독자 대중이 원하지 않는(다고 보이는)데, 시대가 바뀌었는데, 자본주의 주식회사인 대형 출판사가 그것에 올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현기영은 바로 그 지점에서 한국문학은 많은 독자를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편견에서 벗어난 리얼리즘이란, 바로 지금 이곳 공동체의 깊숙한 속살을 감동적으로 드러내 공유하고 성찰하는, 과감하게 시장의 가치를 부정할 수 있는 문학이라는 것이다.

현기영은 제주에서 태어나 만 7세 때 ‘4·3’을 겪었다. 참수된 이웃의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백설 위에 동백꽃처럼 선연한 장면들을 보았다. 이제 막 세상의 장면들이 흡수되기 시작할 성장기 초입에 그런 재난을 겪었으니, 그의 무의식에 축적된 트라우마의 깊이는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중학교 때 제주도 전체 백일장대회에서 1등을 했고, 2학년 때는 전국 문예대회에서 2등을 거머쥐어 천재문학소년으로 제주에서 호를 날렸다. 신춘문예로 문단에 나온 뒤로는 내면을 억압하고 지역공동체의 집단무의식을 사로잡은 4·3의 비극을 글로 풀어내지 않는 한 작품활동을 하지 못할 것 같아 중편 ‘순이 삼촌’을 써서 창비에 보냈다. 제주에서 일어난, 좌익 소탕을 빌미로 수많은 양민이 학살된 그 비극은 그때까지는 봉인된 것이었다. 현기영의 이 작품으로 인해 4·3은 새롭게 햇빛을 보게 됐고, 작가는 유신 붕괴 후 전두환 군부 보안사에 끌려가 야만적인 고문을 당했다.

그는 그동안 4·3에서 벗어나 이른바 본격 혹은 순수문학이라는 이름의 다른 문학을 해보려는 욕망을 지니지 않았던 게 아니지만 두 번이나 혹독한 고문을 더 당했다고 했다. 꿈속에서 다시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그 고문 주체가 “네가 무얼 한 게 있다고 도망가려느냐”고 힐난하는 4·3영령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제주 말로 무당이 심방인데, 나 같은 작가는 천생 그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즈음 4·3영령들을 진정성을 담아 진혼하는 장편을 준비 중이다. 자료는 모두 확보해 놓고 구상까지 마쳤지만 책상 앞에 앉아 시작하기가 힘들어 2∼3년째 고심 중이라고 했다.

늦게 도착한 후배 시인 박철을 앞에 두고 현기영은 석양녘에 노래를 불렀다. 아일랜드 민요 가락에 얹은 잉글랜드 노래 ‘대니 보이’. 청년기 제주에서 좋아했던 여학생이 폐결핵에 걸려 죽으면서 자신의 묘비명으로 써 달라고 했다는 2절 가사 마지막 부분을 그는 직접 노래로 불렀다. 한국작가회의 후배들이 주는 ‘아름다운 작가상’도 받은 그이를 두고 박철 시인은 젊은 후배들과 가장 가까운 선배, 어느 술자리에서든 가장 끝까지 앉아 있는 낭만적 리얼리스트라고 귀띔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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