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신정근칼럼] 승복의 전제조건들

관련이슈 신정근 칼럼

입력 : 2015-09-20 22:19:05 수정 : 2015-09-20 22:36:31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대타협 이후도 서로 비방 일삼아
합의 결과 존중·준수하는 자세를
우리 사회의 키워드를 들라면 취업, 고용, 성장, 복지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문제가 제대로 조정,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루기 어렵다. 발전을 이루지 못하면 우리 사회의 현재와 미래에서 희망의 싹을 찾기 쉽지 않다. 최근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는 노동시장의 구조개선을 위한 노사정 합의문을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보통 다양한 집단과 세력이 오랜 진통 끝에 대타협, 결단, 합의문 등을 마련하면 그간에 있었던 논란과 갈등이 정리된다. 대타협이 있기 전에 신랄한 설전과 낯 뜨거운 공세가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대타협이 이루어지는 순간 온 우주가 멈추는 듯한 고요와 정적이 찾아온다. 즉 대타협의 전후가 확연하게 다른 국면이 전개된다.

신정근 성균관대 교수·동양철학
하지만 우리 사회는 대타협의 이전과 이후가 그렇게 다르지 않다. 대타협을 이룬 뒤에 축하의 이야기가 곳곳에 울려퍼져도 대타협 이전에 각양각색의 목소리가 나오고 이후에도 여전히 온갖 목소리가 나온다. 한쪽은 우리나라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지만, 다른 한쪽은 노동계가 크게 양보한 반면 재벌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우려를 나타낸다. 한쪽은 해고가 일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다짐하지만, 다른 한쪽은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못하고 또 하나의 보장을 요구하려고 한다.

이런 현상은 노사정의 대타협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여야가 치열한 정쟁 끝에 협의문을 조인하고서 다음날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정부와 시민단체가 사회 현안을 두고 오랜 진통 끝에 타협안에 사인하고서 다음날 상대의 곡해를 비판하고, 남북도 설전을 주고받다가 고위당국자 회담을 벌인 다음에 서로 실천의지가 약하다고 비방을 일삼는다.

대타협, 협의문, 합의문 등은 기본적으로 쌍방간의 약속(계약)을 문서화한 작업이다. 이런 점에서 약속을 하고서 설왕설래를 한다면 그와 관련된 관념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약속은 둘 다 물건을 사용해 둘 이상을 하나로 묶어서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작업이다. 이에 따르면 약속은 당사자 사이에 다른 것의 개입을 배제하고 오로지 그것에 집중하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12월24일 오후 6시에 명동에서 만남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이 같은 시간에 다른 곳에 가 있다면 특정 시간과 장소를 묶는 의식이 약하다고 할 수 있다.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

첫째, 상황의 압박에 못 이겨 합의의 국면으로 내몰렸기 때문이다. 쌍방은 합의를 바라지 않지만 주위가 합의를 바라보며 억지로 대화의 장에 나서 논의의 결론을 내렸다. 주위의 싸늘한 시선을 의식하면 한시라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결론을 내린 뒤에도 사소한 문구나 말을 시빗거리로 삼아 합의를 깨려고 한다.

둘째, 말의 의미를 단일하게 규정하지 않고 다의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남겼기 때문이다. 단어와 말은 사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하는 어감의 차이를 배제할 수 없다. 시간에 내몰려서 합의문을 작성해 발표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같은 말에 대해 서로 다른 이해를 하고 있는 셈이다.

셋째, 대타협을 통해 논란의 종지부를 찍으려는 의지가 약하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각자 이해관계를 달리하므로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다. 대타협에 나서려면 어떤 일이 있어도 타협의 결과를 존중하고 현실에서 준수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렇게 하면 갈등과 이견의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충분한 시간을 들여 오해를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러한 전제조건이 갖추어진다면 대타협과 합의문이 나온 뒤 승복의 태도가 나타날 것이다. 그와 더불어 우주의 정적이 찾아오고 뒤이어 화합의 목소리가 터져 나올 것이다. 이때 승복하지 않으면 말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말을 저버린 사람이 돼 버리기 때문이다. 앞으로 합의문을 발표하고 사진 찍기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전제조건을 잘 지켜서 합의문을 승복하는 사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때다. 그렇지 않으면 상실된 신뢰와 실추된 언어를 되살릴 수 없을 것이다.

신정근 성균관대 교수·동양철학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한지민 '우아하게'
  • 한지민 '우아하게'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최지우 '여신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