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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小窓多明] 우리말 지키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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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10-12 22:07:51 수정 : 2015-10-12 22: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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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뜻 뿌리 알아야 한글 더 사랑
영어처럼 초등생부터 한자 가르쳐야
교육부에서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병기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공청회를 열자 다시 한글-한자 논쟁이 일어나는 듯하다. 이즈음 국내 쌍벽을 이루는 두 여자대학교의 학교안내 광고가 눈길을 끈다. 한 학교는 ‘혁신을 쓰다’라는 한글로만 광고문구를 내세웠고, 다른 학교는 ‘겸인지용(兼人之勇)과 호연지기(浩然之氣)’라는 문구를 한자로만 내세웠다. 이를 본 한 신문의 젊은 기자는 “한자 사자성어로 해야만 뜻이 명확하고 한글만 쓰면 그 뜻이 명확하지 않나요”라며 한자병기 쪽을 비판했다.

언뜻 보면 한글전용 쪽이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비교하는 문구가 다르고 교육부의 방안은 한자로만 쓰자는 것이 아니므로, 비교 방법이 옳지 않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수원시의 관광안내책자에 있는 이런 한글만의 안내문은 어떤가.

이동식 언론인·역사저술가
“화성의 각루는 4개소가 있으며 동북각루는 성의 동북요새지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방화수류정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동북각루는 건축미가 화려하면서도 우아하여 화성의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르는 곳이다. 방화수류정에서 바라보는 용연 위에 비친 달빛과 어우러진 버들가지는 용지대월이라 하여 수원팔경 가운데 으뜸이다.”

우리는 수원 화성을 들어보았지만 왜 화성이라고 했는지, 화성이 별이름하고 어떻게 다른지는 알지 못한다. 각루는 무엇인지, 방화수류정은 혹 방화시설이나 수류탄 투척지가 아닌지 헷갈린다. 용연은 방패연과 다른 무슨 연인가. 수원팔경 중에서 으뜸이라고 하는 용지대월은 어디에 쓰이는 종이 혹은 서식을 말하는 것인가 알 수가 없다.

여기에 한자를 병기하면 “화성(華城)의 각루(角樓)는 4개소가 있으며, 동북각루(東北角樓)는 성(城)의 동북요새지(東北要塞地)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동북각루는 화려하면서도 우아하여, 화성(華城)의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르는 곳이다. 방화수류정에서 바라보는 용연(龍淵) 위에 비친 달빛과 어울어진 버들가지는 용지대월(龍池待月)이라 하여 수원팔경 가운데 으뜸이다”가 될 것이다. 여기 나오는 한자는 우리가 늘 쓰는 것들이고 이 문장을 읽으면 방화수류정이란 정자는 네모진 모퉁이에 있는 누각으로서 아름다운 꽃들과 버들이 많은 곳이며, 그 꽃과 버들이 달밤에 용의 연못에 비치는 것이 이곳 화성의 제일 멋진 경치이고, 그러기에 이 성을 만들도록 한 정조대왕이 화성(華城), 곧 꽃처럼 아름다운 성이라고 이름지어주었음을 쉽게 알겠다.

광복 후 처음 한글날을 제정할 때만 해도 신문 지면이나 교과서, 공문서 등이 한자 위주였지만 이제는 한글로 다 표기하고 있어 한글전용은 성공했다고 하겠다. 그러기에 한자 없이도 뜻이 잘 통하는데 왜 어려운 한자를 어릴 때부터 가르치려는가 하고 비판한다. 그것은 한글만 쓰다 보니 단어나 말의 개념이 불명확해지고 혼동이 발생하기에 그 뿌리인 한자를 배워서 정확한 언어를 쓰자는 것일 터이다. 그것은 한자전용으로 가자는 것은 아니다. 배우기 어려운 게 문제라면 수학이나 물리, 화학 등은 왜 어릴 때부터 가르치는가?

한글이 우리글이기에 모든 우리말은 한글로만 적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영어도 배우지 말고 한글만 쓰자는 주장과 같은 논리라 하겠다. 한자에는 뜻과 생각하는 힘이 있어 새로운 현상이나 개념과 맞부딪칠 때 그것을 우리말의 범위 안에서 표현해낼 수가 있지만 한자의 뜻 대신에 발음만 배우면 우리말은 남의 나라의 개념이나 현상을 따라 가는 것 외에는 다른 수가 없다. 한글로 표기하되 중요한 개념은 한자로 공부하고 필요할 때에 병기를 하자, 아니 배워두기만이라도 하자, 그것은 우리말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에 생각 능력을 되찾아서 이 시대 진정한 한국말로 키우자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최근 우리말이 급속히 외국어에 침식당하는 현상이 많아진 것도 한글로만 읽다보니 새로운 개념에 적응할 능력을 상실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얼마 전 모 방송의 드라마 제목이 ‘어셈블리’라나 뭐라나, 그런 제목이 우리말 속에 들어와야 할 것인가. 최근 영어단어를 써서 ‘∼∼한’, ‘∼∼하다’ 등으로 얼버무리는 우리말이 많아진 것도 그것 아니겠는가.

광복 이후 70년, 우리는 우리말과 우리글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 다만 지난 2000년 가까이 우리들이 생각과 뜻의 뿌리가 된 한자를 끝까지 배제시키면 우리 말이나 우리 생각은 영어 등 외국어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한글만이 우리글이라면 영어는 왜 가르치는가. 초등학교에서 영어교육을 시작했다면 한자교육도 당연히 함께 해야 한다. 한글날 전후에 반복되는 한글전용 논쟁은 배우기 쉬워 누구나 금방 다 배우는 한글을 더 배우자는 것이 아니라 21세기에 우리말을 더 힘 있고 튼튼하게 만들어 잘 쓰자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지 않을까.

이동식 언론인·역사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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