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추상을 통해 한국추상에 ‘또 하나’를 보태고 있는 원로작가인 산정 서세옥(87)은 인간 시리즈를 통해 수많은 인류의 희로애락을 표현하고 있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의 특별전에 이어 갤러리 현대에서 최근작을 중심으로 개인전을 하는 그를 전시장에서 만났다.
대범한 붓질, 단순한 점과 선만으로 사람의 형상을 표현한 작품으로, 작가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붓 끝에서 탄생한, 단순하지만 과감하고 자유로운 선이 눈길을 끈다. 정통 동양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새로운 회화를 시도한 작가는 1960년대의 수묵추상을 통해 한국 추상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1970년대 이후엔 일관되게 인간 시리즈에 몰두하고 있다.
“화가는 있지도 않은 용(龍)을 잡는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서세옥 작가. 그는 "용이란 가상의 동물이 아니고 팽만한 우주의 정기, 즉 끝없는 에너지를 가리키는 것"이라며 "이를 깨닫는 순간 참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 "이라고 말했다. |
산정은 전시에 맞춰 평소의 글을 모아 ‘산정어록’도 출간했다. 작가로서 삶에 대한 통찰이 담겼다. “그림이 쉬운 일이 아닌 것은 그림이 하늘과 땅을 감싸 안아야 하고 과거와 미래를 감싸 안아야 하고, 또한 하늘과 땅을 놀라게 하고 과거와 미래를 놀라게 하고, 또한 하늘과 땅을 허물어 버리고 과거와 미래를 허물어 버리는 일인 까닭이다. 화가의 붓끝은 이러한 일들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
그는 늘 화가로서 되묻는다. “어둡고 고요한 밤, 어디에선가 종소리가 아득하게 울려온다. 나는 꿈속에서 꾸던 꿈을 화들짝 깨면서 애초부터 꿈속의 꿈이었던가를 스스로에게 되물어 본다.
그에게 화가란 어떤 존재일까. “예부터 화가의 일을 ‘도룡’ 이라고 했지. 무찌를 도(屠) 자와 용 룡(龍) 자. 용을 사로잡는다는 뜻이지. 가만히 생각해보면 말이야, 용이라고 하는 것은 뱀에다 발과 뿔을 달아 가상으로 만들어 놓은 동물인데, 사람이 가상적인 동물을 사로잡으려고 일생을 걸어, 그게 화가지.”
그는 가시적인 대상에 노예 노릇을 거부한다. “절대의 큰 바다에는 형태가 없어, 나는 때때로 대상을 초월하여 무극(無極)의 저 공간에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하지. 거기에는 절대해방과 절대자유가 있지.”
요즘도 밤늦도록 한학 책들과 씨름을 한다. 붓질의 길은 거기서 나온다. “인간은 유한하다. 때문에 영원을 동경한다. 있으면 반드시 없는 것이 뒤따르고 없으면 반드시 있는 것이 뒤따른다. 이것이 바퀴처럼 영원히 돌고 도는 무극의 참모습이다. 이를 통찰할 때 우리는 무아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어느 산사의 큰 스님으로부터 법문을 듣고 있는 착각이 밀려 올 즈음 그가 한 말은 초월의 미학이었다,
“저 절대의 소리를 귀로 듣지 않고 눈으로 듣는 것이 관음(觀音)이요, 저 절대적 향내를 코로 느끼지 않고 귀로 느껴야 하는 것이 문향(聞香)의 경지다. 이것이 화가가 알아야 할 초월의 미학이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