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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민족의 아픔 간직한 왜성… 꽃들이 위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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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4-29 10:30:00 수정 : 2016-04-28 20:4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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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전통 숨쉬는 울주
울산 울주 서생포 왜성 본성의 성벽과 바다 풍경. 분홍빛을 띤 왕벚꽃이 한창이다.
울산광역시 울주군는 울산 면적의 70%를 차지한다. 공장이 몰려있는 울산을 생각하면 굴뚝과 번화가 등이 먼저 떠오르지만 울주는 이와 다르다. 전통과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곳이다. 조상이 사용하던 그릇과 항아리 만드는 방법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는 옹기마을과 임진왜란 당시 일본이 조선 민초를 강제로 동원해 지은 서생포 왜성이 잘 보존돼 있다. 다른 지역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역사의 한 부분을 들춰 볼 수 있는 곳이다.

◆사명대사의 결기가 서려있는 서생포 왜성

“조선 최고의 보물은 무엇이요.” “그것은 일본에 있을 것이오.” “그게 무엇이오.” “바로 당신의 목이오.”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울주 서생포 왜성에서 벌어진 사명대사와 왜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 강화회담의 일화로 전해내려오는 내용이다. 수만명의 왜적으로 둘러싸인 적진에 협상하러 가서도 기백을 잃지 않은 사명대사의 결기가 남아있는 곳이 서생포 왜성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명나라의 반격으로 쫓긴 왜군은 남해안 지역에 30여곳의 왜성을 짓는다. 
울산 울주 서생포 왜성 아랫부분에 있는 성벽. 산 정상에 본성이 있지만 수풀이 우거져 성벽이 보이지 않는다.

현재는 많은 곳이 훼손됐지만 서생포 왜성은 당시 모습이 가장 많이 남아있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 수군의 진지로 300여년간 사용됐고, 이후 일제 때는 일제가 자신들의 조상이 남긴 흔적이다 보니 유적으로 지정해 관리했기 때문이다. 해발 200m 산 꼭대기에 본성을 두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중간에 제2성, 가장 아래에 제3성을 쌓은 전형적인 일본식 성의 모습이 남아있다. 본성은 가파른 흙길로 이어져 있다. 비라도 오면 흙길이 미끄러워 오르기 쉽지 않다. 봄부터는 나뭇잎이 만발해 아래에서는 성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다. 천혜의 요새 조건을 갖추고 있다. 본성에 들어서면 우리가 보던 성과는 다른 구조를 볼 수 있다. 본성 출입구를 통과하면 바로 본성 내 건물들로 이어지는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성내로 쉽게 진입하지 못하도록 미로 식으로 성벽을 구축해놨다.

울산 울주 서생포 왜성 정상 성벽 위에서 보이는 바다 풍경.

경계와 전투의 용이성 등 군사적 필요로 성벽이 돌출돼 있는데, 지금은 이런 곳들이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다. 오르막 흙길을 따라 산 정상에 오르면 명선도와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군데군데 왕벚나무들의 분홍빛 꽃이 한창이다. 굴곡진 역사의 한 곳이지만 지금은 여행객들에게 많은 이야기와 멋진 풍경을 전달하는 곳이 된 셈이다.

◆숨을 쉬는 그릇… 옹기

마당 한 곳에 간장, 된장, 고추장 등 각종 장이 담긴 장독들이 모여 있다. 어머니는 빈 그릇을 들고가 장독 하나의 뚜껑을 열어 장을 한 그릇 퍼서 부엌으로 가져와 여러 음식을 하고, 밥상을 준비한다. 일상이었던 이 모습은 이제 옛것이 돼버렸다. 마당이 있던 단독주택은 아파트로 변했고, 장독은 김치냉장고가 대신하고 있다. 장들은 오래 보관할 필요도 없다. 언제든 사서 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울산 울주 외고산 옹기마을에 있는 다양한 모양의 옹기들. 예전만큼 수요가 많지 않지만 외고산 옹기마을은 우리나라 옹기 생산의 50% 이상을 책임지고 있다. 기계의 도움도 받지만, 아직 수작업으로 만드는 전통 옹기의 명맥을 유지하는 장인들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렇다고 장독으로 대표되는 옹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예전만큼 수요가 많지 않을 뿐 여전히 전통을 잇고 있는 곳이 있다. 울주 외고산 옹기마을이다. 우리나라 옹기 생산의 50% 이상을 책임지고 있다. 전통 방식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기계의 도움도 받지만, 아직 수작업 전통의 명맥을 유지하는 장인들이 남아 있는 곳이다.
울산 울주 외고산 옹기마을의 한 장인이 물레 위에서 항아리를 빚고 있다.

6·25전쟁 이후 부산에 피란민이 몰리자 옹기 수요가 늘었다. 당시 경북 영덕에서 옹기를 만들던 장인 허덕만씨가 이곳에 자리 잡았다. 생활이 어렵던 당시 옹기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몰려 마을은 급속도로 커졌다. 1960∼1970년대에는 350여 가구가 옹기를 만들 정도로 발전했지만, 산업화로 옹기 수요가 줄면서 마을은 점차 쇠퇴했다. 지금은 40여 가구가 전통 및 현대 방식으로 옹기를 빚고 있는데, 7명이 울산시 무형문화재로 등록돼 있다.

흙을 손수 반죽해 만든 흙띠를 물레 위에서 돌려가며 쌓아올려 옹기 모양 만들고, 수차례 건조작업을 거친 후 섭씨 1200도에 이르는 전통 가마에서 9일 밤낮을 구운 후 4일간 식힌다. 이때 표면에 공기구멍인 기공이 만들어져 숨을 쉬는 그릇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모양이 이상해 열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하거나, 가마 온도가 일정치 않으면 옹기는 주저앉게 된다. 각고의 노력 끝에 탄생해 생명력을 품고 있는 것이다.

장독에서 질그릇까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옹기 종류만 300여 가지지만 지금은 옹기 제작 시 상당수 과정을 기계로 대신하다 보니 이를 다 만들 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수요가 많지 않은 옹기 종류는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옹기장들은 명맥 유지를 위해 단순히 우리가 보는 장독대나 질그릇 등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마인물상 등 옛 토기를 재현하거나 옹기로 예술 작품을 만드는 등 질적 변화를 꾀하고 있다. 아이들이 직접 흙을 만지고, 옹기를 만들면서 우리 전통을 체험할 수 있도록 다음달 5일부터 나흘간 이 마을에서 옹기축제가 열린다.

울주(울산)=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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