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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요즘 '전수조사 전성시대'… "불신사회의 씁쓸한 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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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5-28 13:00:00 수정 : 2016-05-28 14: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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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화학제품, 전관 변호사 수임 내역, 조현병 환자 관리 실태 등 뭐만 터지면 ‘전수조사’ /
“전부 까발려 내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못 믿겠다”는 불신사회의 민낯 여실히 드러나
“6월까지 생활화학제품 제조·수입 업체 8000여 곳으로부터 제품에 함유된 살생물질 종류에 관한 자료를 받아 실태를 전수조사하겠습니다.”(홍정섭 환경부 화학물질정책과장)

“각 지방변호사회에서 제출받은 ‘전관’ 변호사들의 사건 수임 내역을 전수조사해 수임 경위 등에 비위 사실이 있는지 파악할 계획입니다.”(문철기 법조윤리협의회 사무총장)

“조현병(옛 정신분열병) 환자 분들이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전수조사를 한 번 시도해보겠습니다.”(김광림 새누리당 정책위원회 의장)

요즘 온 나라가 ‘전수조사’ 열풍이다. 대한민국이 느닷없이 전수조사 공화국이 된 느낌이다. 환경부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여파로 방향제, 탈취제 등 일상생활에서 널리 쓰이는 화학제품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자 25일 브리핑을 열어 인체 유해성 여부를 가리기 위한 전수조사 방침을 밝혔다. 법조윤리협의회는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대표 구명 로비 등 판검사 출신 전관 변호사들의 법조비리 논란이 커지자 24일 전관 변호사 280여명의 사건 수임 내역을 상대로 전수조사에 착수했다.
검사장 출신 홍만표 변호사가 법조비리 사건 피의자로 검찰에 출석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법조윤리협의회는 법조비리 파문이 커지자 홍 변호사 같은 전관 변호사들의 사건 수임 내역 전수조사에 나섰다.

서울 강남역 화장실에서 벌어진 ‘묻지마’ 살인사건 범인이 조현병을 앓아 온 것으로 드러나면서 조현병 환자 관리 실태로 ‘불똥’이 튀었다. 여당인 새누리당은 27일 여성가족부, 보건복지부, 법무부 등 행정부 부처들과 당정협의를 갖고 국내 조현병 환자 관리 실태 파악을 위한 전수조사 실시를 결정했다.
서울 강남역 화장실 ‘묻지마’ 살인사건 피의자 김모(34)씨가 경찰관들에 의해 압송되고 있다. 김씨가 조현병(옛 정신분열병)을 앓아 온 사실이 드러나자 당정은 국내 조현병 환자 관리 실태 전수조사 실시를 결정했다.

최근 언론에서 ‘전수조사’가 처음 등장한 것은 검찰이 수사 중인 법조비리와 관련해서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검사 이원석)는 정 대표의 상습도박 사건을 검찰 수사 단계에서 변론한 검사장 출신 홍만표 변호사의 탈세 의혹을 살펴보던 중 그가 2011년 대검찰청 기획조정부장을 끝으로 검찰을 떠나 변호사 개업을 한 이후 현재까지 수임한 사건 내역을 일일이 검증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몇몇 언론이 ‘검찰, 홍 변호사 수임 내역 전수조사’라고 제목을 뽑으면서부터 전수조사란 용어가 붐을 타기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28일 통계학계에 따르면 ‘전수조사’는 모집단 내 일부만 조사해 전체를 추정하는 ‘표본조사’와 달리 모집단 전부를 조사하는 기법을 뜻한다. 학자들은 “표본에서 모집단을 추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차가 없다는 것이 전수조사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전수조사는 시간과 비용이 너무 많이 소요되기 때문에 모집단이 아주 적은 경우 이외는 거의 실시가 불가능한 만큼 일반적으로는 표본조사가 많이 활용된다”고 설명한다.

전수조사가 뭔가 철저하게, 확실히 문제를 파헤친다는 긍정적 어감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선지 요즘 사회 구성원 모두가 ‘전수조사’란 용어에 너무 집착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7일 보건복지부 등이 참여한 가운데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민안전 민관합동회의’가 대표적이다. 회의가 끝난 뒤 정부는 “6월 말까지 전국 5400곳의 양로시설과 요양시설의 인권 실태에 대해 전수조사를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상점에 진열된 생활화학제품들. 가습기 살균제 사건으로 화학물질의 유해성에 대한 공포가 확산하면서 정부는 시중에서 판매 중인 생활화학제품들을 대상으로 전수조사에 착수했다.

이같은 전수조사 열풍의 배후에는 ‘정부든 누구든 남의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으니 전부 까발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겠다’는 의식이 깔려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전수조사, 전수조사 하고 외치는 현실은 한국 사회가 극심한 ‘불신의 늪’에 빠져 있음을 보여주는 씁쓸한 한 단면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올 초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14∼18세 청소년 10명 중 8명이 우리 사회를 불신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을 신뢰할 수 없다’고 여긴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지난해 말 한국행정연구원도 국민 10명 중 7명이 ‘한국의 경제·사회적 분배구조는 공정하지 않다’고 여긴다는 등 불신사회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민들이 2014년 세월호 참사와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를 경험하면서 ‘정부를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이 정서 깊숙히 자리잡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불신이 팽배하니 무슨 사안이 터질 때마다 전수조사에 나서게 되고, 통계학자들의 지적처럼 표본조사보다 훨씬 힘든 전수조사를 하다 보니 시간·비용이 너무 많이 소요된다.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는 한국 사회를 불신사회로 단정한 뒤 “불신사회에 사는 건 참 피곤한 일이고, 그래서 우리 사회는 ‘피로사회’이기도 하다”고 탄식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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