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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최고의 행서, 왕희지의 ‘난정서’ 분석

입력 : 2016-07-21 20:37:29 수정 : 2016-07-21 20:3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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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형씨 ‘난정연회’ 출간 당 태종은 자신이 죽을 때 ‘난정서’(蘭亭序)를 함께 묻으라고 했다. 난정서는 명필 왕희지의 글씨. 왕희지의 작품에 대한 애호가 대단했던 당 태종이 죽어서까지 함께하려고 일종의 순장을 명한 셈이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군주로 꼽히는 당 태종이 그토록 사랑했던 난정서는 어떤 작품일까.

353년 음력 3월, 따뜻한 봄의 한 날 왕희지는 귀족 41명을 불러 연회를 열었다. 그의 아들 7명이 있었고, 동진(東晉)을 대표하는 귀족 사안, 손작 등이 초대에 응했다. 술잔을 물에 띄어놓고 시를 짓고, 그것을 못하면 벌주를 내리는 흥겨운 자리였다. 이때의 시를 모아 엮은 책이 ‘난정집’이고, 책의 서문이 난정서다. 왕희지가 쓴 이 글은 ‘동양 최고의 행서’로 꼽힌다. 

‘난정연회’(하태형 지음, 한길사·사진)는 난정서의 아름다움과 서예사적 위치 등을 분석한 책이다. 난정연회가 열리게 된 배경, 당시의 시대상황, 난정집에 실린 시의 철학적 배경까지 소개한다. 경제학자로 비전공자이긴 하지만 10년 동안 꾸준히 난정서를 파고든 저자는 중국, 한국의 다양한 문헌을 두루 살펴 왕희지와 그 주변인물의 생애와 인간상을 그려냈다.

책은 황권이 압도적이었던 중국사에서 유일한 예외가 왕희지가 살다간 남북조시대였다고 설명한다. 황권의 약화는 찬란한 귀족문화를 꽃피우는 계기가 되었다. 왕희지는 물론 난정연회 참석자들은 모두 당대를 주름잡은 거물들이었다. 당시의 귀족들은 경치가 좋은 곳에 별장을 짓고 비공식적 회합을 가져 결속을 다졌다. 난정서는 귀족문화의 단편이었던 것이다.

책은 또 난정서의 여러 판본과 진위 문제를 다룬다. 현재 난정서의 원본은 소재를 알 수 없고 베껴 쓴 여러 개의 판본이 전한다. 이 중에는 ‘초당 3대가’로 불리는 구양순, 저수량, 우세남도 있어 그 자체로 다른 명품의 가치를 가진다. 저자는 중국, 한국의 문헌을 비교하며 난정서 진위 논쟁에 뛰어든다.

강구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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