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바퀴 도는데 30분이면 넉넉한 작은 저수지 경남 밀양 위양못은 이맘때 하얗게 핀 이팝나무꽃으로 뒤덮여 있다. 한 톨의 쌀알 같은 꽃잎들이 모여 나무를 온통 하얗게 물들인 이팝나무와 완재정이 몽환적인 풍경을 자아내며 봄의 끝자락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
쌀알 같은 꽃잎들이 모여 나무를 온통 하얗게 물들인다. 함박눈이 내려 나무에 소복이 쌓인 것 같다는 낭만적인 감상에 빠져들게 한다. 서양에선 마치 흰 눈이 내린 것 같다 해서 눈꽃나무(snow flowering)로 부른다.
하지만 이 같은 낭만은 불과 40∼50여년 전만 해도 우리에겐 사치였다. 배 곯던 시절 이 나무를 보며 서민들은 고봉으로 퍼담은 쌀밥을 떠올렸을 법하다. 이팝나무가 피는 시기는 24절기 중 입하 무렵이니 보리를 추수하기엔 아직 이른 때다. 곤궁한 삶에 먹고살 걱정이 컸던 ‘보릿고개’가 딱 이맘때였다. 이팝나무 꽃잎을 자세히 보면 쌀알처럼 생겨, 보릿고개 시절 그릇을 한가득 채운 쌀밥(이밥)이 떠오른다.
이팝나무 꽃잎을 자세히 보면 쌀알(이밥)처럼 생겨, 보릿고개 시절 그릇을 한가득 채운 쌀밥이 떠오른다. 다른 봄꽃에 비해 화려함은 덜하지만, 옛날부터 우리 조상과 함께 살아오며 애환을 같이한 나무가 이팝나무였다. |
이팝나무 이름과 관련된 전설도 가난과 관련 깊다. 병든 노모를 모시고 살던 나무꾼에게 노모가 어느 날 흰 쌀밥을 먹고 싶다고 했다. 쌀독에 남은 쌀을 톨톨 털어 밥을 지은 나무꾼은 고심 끝에 마당에 있는 나무에 핀 흰 꽃을 따와 자기 밥그릇에 담고, 노모 밥그릇에는 흰 쌀밥을 담았다. 노모는 오랜만에 흰 쌀밥을 맛있게 먹었는데, 이 일이 알려지면서 나무꾼이 따온 흰 꽃 나무를 이밥나무로 부르다 발음이 변해 ‘이팝나무’가 됐다고 한다. 또 이팝나무는 풍년이 들지, 흉년이 들지를 가늠해보는 역할을 했다. 이팝나무 꽃이 잘 피면 풍년이 들고 그러지 않으면 흉년이 들었다고 한다. 이팝나무 꽃이 피는 시기가 못자리하는 철이어서 꽃이 잘 피면 물이 충분해 벼농사도 잘 됐다는 것이다. 다른 봄꽃에 비해 화려함은 덜하지만, 옛날부터 우리 조상과 함께 살아오며 애환을 같이한 나무가 이팝나무였다.
밀양 단장면 평리마을에선 이팝나무 축제가 열린다. 평리마을 가는 도로에 하얀 꽃을 피운 이팝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다. |
이에 동네마다 저수지 근처엔 이팝나무들을 많이 심었는데, 시간이 흘러 지금은 하얀 꽃구름을 피워 올린 이팝나무와 저수지가 이루는 풍광이 지나가는 봄의 정취에 한껏 취하게 한다. 경남 밀양 위양못의 이팝나무도 농사의 풍흉을 가늠하기 위해 심어졌을 것이다. 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위양못은 과거 주위 농경지에 물대는 역할을 하던 저수지였지만, 지금은 인근에 가산저수지가 생기며 그 역할마저 없다. 이름도 자주 바뀌었다. 옛날에 양량제(陽良堤)라 하기도 하고 양야지(陽也池) 또는 양량지(陽良池)로도 불렸다.
다른 글자들은 바뀌었지만 볕을 뜻하는 양(陽)자는 그대로 쓰이다가 지금은 백성을 위한다는 뜻의 마을 이름 위양리(位良里)에서 이름을 따와 양(陽)자가 빠졌다.
바람이 잔잔할 때 위양못은 이팝나무와 완재정, 녹음이 우거진 마을 뒷산이 저수지에 비친 반영이 어우러져 어디가 실제인지 헷갈리게 한다. |
한 바퀴를 도는 데 30분이면 넉넉한 위양못은 이맘때 하얗게 핀 이팝나무꽃으로 뒤덮여 있다.
경남 밀양 영남루는 본루와 손님이 잠을 자는 침류각을 연결하는 통로가 계단으로 돼 있다. 침류각과 본루 사이에 지붕을 얹어 비를 피하도록 되어있다. |
위양못 산책로에서는 저수지 물속에 뿌리를 두고 자라는 나무, 땅에 뿌리를 둔 채 물속에 기둥을 담그고 누워서 자라는 나무 등을 볼 수 있다. |
위양못 산책로에는 왕버들, 수양버들, 이팝나무, 소나무, 팽나무 등 오래된 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저수지 물속에 뿌리를 두고 자라는 나무, 땅에 뿌리를 둔 채 물속에 기둥을 담그고 누워서 자라는 나무 등이 식생을 이루고 있다. 다양한 모습의 나무 구경을 하다 저수지를 보면 이팝나무꽃과완재정이 어우러진 풍경에 빠져들게 된다. 거기에 바람이 잔잔할 때 실경과 못에 비친 반경을 보면 어디가 실제 모습인지 헷갈리게 한다. 녹음이 우거진 마을 뒤편 산까지 못 속으로 빨려 들어와 봄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밀양=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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