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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뿐인 공용어…설 곳 없는 한국수어 [편집인의 원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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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6-03 10:08:32 수정 : 2023-06-19 14: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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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깔린 많은 종이들 가운데 하나를 탁 집어 책상 위에 올려놓는 일. 흔히 언론의 역할로 불리는 어젠다 세팅(Agenda Setting·의제 설정)이 그와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그중에 뉴스 소비자들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가 뭘까. 고민과 취재를 거쳐 우리가 내놓는 기사(어젠다)는 독자에 말을 거는 일이다. 뉴스 수명이 갈수록 빨라지는 요즘,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세계일보만의 기사를 소개한다.
영화 ‘코다’에서 여주인공이 자신의 노래를 듣지 못하는 농인 부모와 오빠를 위해 수어를 하는 장면.

영화 ‘코다’를 보고 가장 감명 깊었던 대목은 여주인공의 대학 오디션 장면이었다. 버클리 음대 오디션장에 선 여주인공은 농인(聾人)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소리를 듣고, 말하는 청인(聽人)이다. 오디션장에 몰래 들어온 농인 부모와 오빠는 딸, 여동생이 부르는 아름다운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들을 위해 여주인공은 노래하면서 수어(手語)를 한다. 코다(Coda)는 농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청인 자녀를 뜻하는 Children of deaf adult의 줄임말이다.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남우조연상, 각색상을 휩쓴 코다는 영화적 흥행뿐 아니라 ‘특별한 소통’에 대한 관심을 일깨웠다.

 

말과 소리가 소통의 전부는 아니다. 청각장애인들이 사용하는 수어가 한국어와 함께 ‘공용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국내에는 약 5만2000여명이 수어를 일상어로 사용하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들의 일상은 같은 공용어인 한국어를 쓰는 이들과 무척 다르다. ‘말뿐인 공용어…설 곳 없는 한국수어’ 시리즈(2023년 5월30일∼6월1일자·김나현·박유빈·윤준호·정지혜·조희연 기자)는 이들이 겪는 어려움과 차별, 제도적인 문제와 개선할 방향에 주목한 기사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뒤늦게 수어 배우는 아이들

 

한국수어가 한국어와 함께 공용어로 지정된 지 7년이 지났지만 청각장애를 가진 이들도 수어를 배우는 데 결심이 필요하다. 말, 소리가 정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 농인에게 청인처럼 행동하라는 압박이 강한 청능주의(오디즘·Audism)가 영향을 미치는 탓이다. 

 

세계일보 취재에 따르면 청각장애를 가진 학생 상당수는 수어 교육보다는 소리를 듣게 만드는 인공와우 수술 등을 통한 일반학교 적응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강했다. 수어를 사용하면 어렵게 살아가리라는 편견 등이 작용해 수어 교육 시기가 늦춰지는 것이다. 국립국어원 조사(2020년) 결과 한국에서 청각장애인의 수어 교육 평균 연령은 15.6세. 특히 농인 10명 중 9명(95%)은 언어능력 발달 집중기인 유아동기 이후에 수어를 배운다. 

 

문제는 이들이 비장애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일반학교에서 적응하는 게 쉽지 않다는 데 있다. 국립특수교육원이 3년마다 실시하는 ‘특수교육 실태조사(2020년)’에 따르면 조사 당시 청각장애인 학생 3004명 중 2466명(82%)이 일반학교에 재학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농인을 위한 특수학교보다는 일반학교 선호도가 꽤 높은 셈이다. 하지만 세계일보 취재진이 학교 관계자와 학부모, 학생 등을 인터뷰한 결과 일반학교의 학습 환경, 교우 관계 등에서 어려움을 느껴 특수학교로 전학을 결심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수어를 배우는 시기가 늦어지고, 이는 의사소통 능력이나 문해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 이준우 강남대 교수(한국수어학회장)는 “청능주의로 가득 찬 한국 사회에서 부모들은 청각장애 자녀의 인공와우 수술과 보청기에 의존한 언어 치료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며 “수어를 가르치지 않고 구어만 교육하면서 무조건적 통합교육을 하면 청각장애 학생들은 교과 내용을 심층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고 우려했다.

코로나 19 상황에 대한 정부 관계자 브리핑을 수어로 설명하는 수어통역사.  

◆수어 통역사 없나요?

 

코로나19 사태는 국민들이 수어에 익숙해지는 계기가 됐다. 코로나19 상황에 대한 정부 브리핑이 이뤄질 때마다 이를 수어로 설명하는 통역사가 옆자리를 지킨 덕분이다. 수어 통역사를 필요로 하는 곳은 많다. 하지만 만성적인 인력 부족으로 통역사를 필요로 하는 농인들도, 통역사로 활동하는 이들도 힘들기만 하다.

 

세계일보가 정의당 장혜영 의원으로부터 전국 17개 시도 지자체 수어통역센터 현황을 받아 분석한 결과, 지난해 말 기준 각 지자체 통역센터에는 평균 3∼4명의 청인 통역사와 1명의 농인 통역사가 근무했다. 지자체별 중증 청각장애인 현황을 감안하면 통역사 1명당 지원하는 청각장애인은 평균 100여명에 달했다. 복지 정책 지원뿐 아니라 법원, 경찰 등 통역 지원 활동 등으로 업무가 가중된 탓에 지자체 통역사들의 평균 재직 기간은 7년에 불과하다. 통역사가 자주 교체되다 보니 농인들도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한 농인은 병원 기록 등 민감한 개인정보를 매번 다시 설명해야해서 “통역사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기분”이라고 했다. 

 

현행법상 국가와 지자체는 공공행사, 사법·행정 등의 절차, 공영방송 등 공익상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에 수어통역을 지원해야 한다. 그러나 국회와 법원 등을 제외하면 여전히 수어통역 서비스는 걸음마 수준이다. 특히 농인들이 절실하게 통역사를 필요로 하는 곳은 대형병원이다. 아픈 부위와 증상을 정확히 설명해야 하는데, 통역사가 없으면 의사와 잘못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어서다. 1등 서비스를 자랑하는 대형병원이라면 육체적 고통은 물론 정신적 불안과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필담’으로 의료진과 소통할 수밖에 없는 농인들의 심경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장애복지학과 수어 통역을 공부하고 있는 대학생 이다빈(20)씨가 지난 5월 31일 취재진에게 수어 신조어를 소개하고 있다. 위쪽부터 ‘유튜브’(한 손으론 알파벳 Y, 다른 한 손으론 ‘보다’ 의미의 수어) ‘SNS상에서 좋아요’(‘좋다’·엄지모양·‘누르다’ 의미의 수어를 차례로)로, 사전에는 없지만 농인들이 의미에 맞게 만들어 사용하는 수어다. 내년에 1차 개통하는 새 수어사전은 농인의 언어생활에 기반한 말뭉치를 활용해 신조어나 유행어도 담을 예정이다. 서상배 선임기자

◆수어를 유튜브에서 배우는 이유

 

말과 글을 배우는 데 필수품은 사전이다. 뜻과 활용 사례가 자세하게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어를 배우는 데 가장 필요한 한국수어사전은 어떨까. 수어사전이 시각언어인 수어의 동적 특성을 담지 못해 ‘반쪽짜리’라는 게 수어를 일상어로 사용하는 농인들의 평가다. 시각적 효과가 뛰어난 유튜브를 통해 수어를 배우는 이들이 많은 이유다. 농학교에 재학 중인 김모(19)양은 취재진에 “수어사전에는 최근 유행어가 없다”며 “유튜브를 보거나 친구들한테 물어보면서 배운다”고 했다.

 

공용어인 수어 발전을 위해 체계적인 수어 사전은 반드시 필요하다. 국립국어원은 이를 위해 12년짜리 장기 프로젝트로 신(新)한국수어사전 편찬 작업을 진행 중이다. 단어 모음집처럼 한국어에 수어를 연결만 시킨 기존 사전의 한계를 넘어, 단어가 사용되는 문장 예시와 동의어·반의어 등도 담고 있다. 시각 중심 언어인 수어 특성상 모든 수어 단어는 영상으로 제작된다. 관건은 예산과 연구인력이다. 현재 국립국어원 수어사전 담당 인력은 고작 2명. 중장기 사업인 만큼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

 

6월3일은 농인의 날이다. 그들을 특별한 눈으로 바라보는 날이 아니라, 일상에서 그들이 겪는 크고 작은 불편과 차별에 공감하는 날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 기사는 농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농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 말을 걸기 위한 것이다. 영화 ‘코다’를 만든 감독 션 헤이더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코다가 사람들의 마음을 더 열리게 했으면 좋겠다. 이 영화는 농인과 청인으로 구분 짓지 않고 누구에게나 닿을 수 있는 이야기다.” 시리즈를 취재한 기자들의 마음도 그럴 것이다.

 

P.S. 취재한 윤준호 기자에게 물어봤습니다. 

 

-수어 기획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 취재하러 갔다가 수어통역사를 만났다. 유튜브에서 화제가 됐던 분이라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본인에 대한 관심보다는 일반학교에 다니는 청각장애인 사례를 알려주며 취재를 제안했다. 일반학교 적응에 굉장히 어려움을 겪고 있던 학생인데 수어 교육을 받으면서 좋아진 경우였다. 수어 교육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취재하면서 독자들에 꼭 알리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처음에는 (장애인,비장애인이 함께 공부하는)통합교육이 좋다고 생각했다. 청각장애를 갖고 있는 학생, 학부모들은 보청기를 끼고 소리를 조금이라도 들을 수 있으면 일반학교에 다니고 싶어 한다. 하지만 수업, 학교 활동이 구어 위주로 진행되다 보니 청각장애인들이 여러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 불이익을 보면 분리교육이 맞는 걸까 고민도 했는데 통합교육에 뭔가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처럼 (보청기 등)기기지원에만 그치지 말고 전담 코디네이터를 둔다든가, 수어 교육을 병행한다든가 ‘통합’에 걸맞은 조치들이 취해져야 한다.”

 

-기사를 마무리하면서 아쉬운 점은. 

 

“수어교육을 늘리면 다 좋을 줄 알았는데 그것만이 정답은 아닌 것 같다. 자녀가 특수학교에 다니는 한 학부모는 “우리 아이, 수어 배우려고 특수학교 간 게 아니다”라고 했다. 들리는 정도에 따라 청각장애인이 요구하는 수준이 다르다. 속기 지원, 자막 지원 등 다양한 지원 방안이 함께 논의돼야 한다. 수어교육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이런 부분을 포괄적으로 다루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관련 기사>

 

[심층기획-말뿐인 공용어…설 곳 없는 한국수어(手語)]

 

<상> ‘소리강요사회’ 속 외면받는 수어 교육

 

① [단독] 무늬뿐인 장애학생 통합교육, 특수학교 재학 절반은 전학생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29509059

 

② ‘청능주의의 폐해’… 농인 95%가 10살 넘어 수어 배운다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29509101

 

③ 전국 특수학교 192개교 중 농학교는 14곳 불과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29509100

 

<중> 수어통역, 법만 만들고 예산은 나 몰라라

 

④ [단독] 한 달 800건 넘게 수어 통역도… 격무에 이직 빈번 농인만 속앓이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30514742

 

⑤ TV자막 아바타수어 번역…예산 부족에 상용화 난항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30514732

 

<하> 문화 빈곤 시달리는 수어 사용자

 

⑥ [단독] 한글 단어에 수어만 연결 ‘반쪽 사전’… “유튜브 보고 배워요”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31516227

 

⑦ [단독] 청각장애인 10명 중 3명 “1년간 영화관람 못했다”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31516226

 

<다하지 못한 이야기>

 

⑧ 침묵과 소리의 경계… ‘소리 없이 빛나는’ 코다(CODA)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603504469

 

⑨ 농인 수어통역사를 아시나요?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603505351

 

⑩ 0.0007%의 기회…장애인·비장애인 ‘같이’ 관람하는 ‘가치봄’ 영화 관람해보니 [밀착취재]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604500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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