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에서 독립’ 위해 나치와 손잡아
그 상당수가 종전 후 캐나다로 이민
전문가들 "복잡한 우크라 현대사…
러시아가 선전에 악용하는 건 곤란"
캐나다 하원 본회의장에서 옛 나치 부역자를 “전쟁 영웅”으로 묘사하며 기립박수를 보낸 사태의 후폭풍이 좀처럼 잦아들지 않고 있다. 논란의 인물을 의회 의사당으로 초청한 하원의장은 사임했고,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국제사회를 향해 사과했다. 하지만 트뤼도 총리에게 비판적인 야당은 이 사건을 “캐나다 역사상 최악의 외교참사”로 규정하며 “총리가 직접 책임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영국 BBC가 28일(현지시간) 이 사건을 계기로 우크라이나의 과거사 그리고 우크라이나와 캐나다의 관계를 집중 조명한 기사를 보도해 눈길을 끈다. 지금과 같은 독립국이 되기 전 수백년간 제정 러시아와 그 뒤를 이은 소련의 지배를 받은 우크라이나의 슬픈 역사가 이번 사태의 배경에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소련으로부터의 독립’ 내걸고 나치 독일와 손잡아
제2차 세계대전 도중인 1941년 6월 나치 독일이 소련을 전격 침공했다. 당시만 해도 소련의 일부였던 우크라이나 땅에 독일군이 처음 나타났을 때 상당수 주민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독일군이 그들을 소련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오랫동안 제정 러시아의 통치를 받았다. 1917년 공산주의 혁명으로 제정이 무너지고 소련이 등장하자 우크라이나는 독립을 선포했다. 하지만 곧 소련군에 제압돼 도로 그 지배 하에 들어갔다. 1932년 우크라이나에 대기근이 발생했다. 소련이 공산화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한 집단농장 건설이 불러 일으킨 재앙이었다. ‘홀로도모르’라고 불리는 이 참사로 우크라이나인 약 500만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소련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우크라이나 주민들의 의지는 더욱 더 강렬해졌다.
하지만 독일은 우크라이나의 해방자로서 온 것이 아니었다. 철저한 인종주의자인 히틀러가 보기에 우크라이나인을 비롯한 슬라브족은 유대인과 별로 다를 게 없는 열등한 민족이었다.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독일군은 가혹한 억압 정책을 펴며 소련과의 전쟁을 계속했다.

이 시기 우크라이나 국민의 상당수는 소련군 휘하에서 독일과 싸웠다. 그들은 어쨌든 ‘파시즘의 침략에 맞서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대의와 함께했다. 반면 일부 우크라이나인은 ‘소련이 독일에 져야 우리한테 독립의 기회가 온다’는 믿음을 가졌다. 독일군은 이런 생각을 갖고 자원 입대한 우크라이나인들로 나치 친위대(SS) 소속 제14사단을 편성했다. 갈리시아 사단이란 별칭으로 널리 알려진 이 부대는 우크라이나 내 유대인은 물론 폴란드인도 학살했다는 의혹이 불거진 상태다.
최근 캐나다 하원의장 초청으로 의사당을 방문해 트뤼도 총리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부부 그리고 캐나다 장관 및 하원의원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은 우크라이나계 캐나다인 야로슬라프 훈카(98)가 바로 갈리시아 사단 소속이었다.
캐나다 앨버타 대학교의 데이비드 마플스 교수(동유럽사)는 BBC에 “나치 독일과 손잡고 싸운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독일이 소련의 통치로부터 자유로운 독립국가 지위를 우크라이나에 부여할 것이라고 믿었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들이 나치와 일정 부분 통하는 점이 있었다고도 했다. 마플스 교수는 “1930년대만 해도 영국을 포함한 대다수 유럽 국가에서 극우 이념이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며 “우크라이나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2차대전 후 캐나다에 정착한 우크라이나계 이민들
그럼 우크라이나와 캐나다는 어떤 관계일까. 오늘날 캐나다는 유럽을 제외하면 우크라이나계 이민이 가장 많이 정착해 사는 국가로 꼽힌다. 트뤼도 총리가 젤렌스키 대통령을 오타와로 초청해 정상회담을 하고 하원이 젤렌스키 대통령의 의사당 연설을 주선한 것도 캐나다에서 무시하지 못할 정치 세력으로 부상한 우크라이나계 공동체를 의식한 결과다.
앞서 소개한 갈리시아 사단은 독일의 패망과 2차대전 종전 이후 전범으로 내몰렸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유죄가 확정돼 처벌을 받은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되레 이들은 연합국에 항복하고 무장해제 절차를 밟은 후 캐나다로 이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캐나다 내 유대인 단체들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 조치는 그대로 시행됐다. 오늘날 캐나다에 거대한 우크라이나계 공동체가 생겨난 원인 중 하나다.
이렇게 캐나다에 정착한 우크라이나계 이민들은 2차대전 당시 갈리시아 사단의 역할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나치 부역자가 아니고 우크라이나를 소련에서 독립시키기 위해 싸운 투사였다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번에 캐나다 하원의장이 훈카를 전쟁 영웅이라고 부른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물론 그는 “훈카가 나치와 관련된 인물인 것은 몰랐다”고 사과한 뒤 사임했으나, 갈리시아 사단 관련자들을 대하는 캐나다의 태도가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 관대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실제로 캐나다 전역에는 갈리시아 사단에서 지휘관으로 일했거나 독일과 손잡고 소련과 싸운 인사들을 기리는 흉상 등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우크라이나계 공동체가 세운 이 기념물들은 해당 인물을 ‘우크라이나 독립을 위해 싸운 영웅’으로 묘사한다. 유대인 단체들이 강력히 항의함에 따라 그 일부는 철거되거나 볼 수 없게 가려져 있다고 BBC는 소개했다.
문제는 러시아가 이를 선전의 도구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러시아는 ‘나치가 지배하는 우크라이나의 탈(脫)나치화’를 명분으로 들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크라이나 지도부를 나치와 연관짓는 러시아의 주장은 크게 잘못된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마플스 교수는 “우크라이나에 극우 극단주의자들이 존재하는 건 분명하지만 적어도 선출직 공무원들은 극우 세력과 무관하다”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나치’라는 식으로 선전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과장이자 지나친 단순화”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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