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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는 오랫동안 국제 공용어였다. 프랑스 아닌 유럽 국가들끼리 서로 양자 조약을 체결할 때에도 각자 언어로 된 조약 원문과 별개로 굳이 프랑스어본을 만들었다. 행여 조약 문구의 해석을 둘러싸고 분쟁이 생기는 경우 프랑스어본을 기준으로 삼아 문제를 해결하기로 약속할 정도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열린 모든 국제회의, 그리고 그때까지 생겨난 국제기구 거의 대부분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채택했다. 1차대전 종전 이듬해인 1919년 프랑스가 개최한 파리 강화회의 때에야 비로소 영어가 프랑스어와 더불어 공용어 지위를 획득했다. 1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3대 연합국(미국·영국·프랑스) 가운데 두 나라가 영어권 국가라는 현실을 감안한 조치였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2018년 3월 20일 ‘국제 프랑코포니(프랑스어 사용권)의 날’을 맞아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프랑스어 진흥 정책인 ‘프랑코포니를 위한 전략’을 발표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독일은 프랑스어만 국제어 대접을 받는 현실이 늘 불만스러웠다. 1870∼1871년 보불전쟁의 결과 프로이센부터 바이에른까지 독일어를 쓰던 크고 작은 나라들이 하나로 뭉치게 됐다. 역사상 최초로 통일 독일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프랑스를 무너뜨린 독일은 자국 언어 보급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세계 각국의 독일 외교관들은 주재국 관리들과 만났을 때 프랑스어나 영어로 대화하던 관행을 과감히 내던지고 당당하게 독일어를 사용했다. 독일인들이 두각을 나타낸 자연과학, 음악 등 분야에서 독일어는 국제 표준어 자리에 근접했다. 다만 1·2차대전에서 잇따라 패배하며 독일어는 진정한 의미의 세계어가 될 기회를 영영 잃고 만다.

 

과거 프랑스어와 독일어의 영광이 어땠는지와 무관하게 지금은 영어의 시대다. 2019년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즉 브렉시트 결정으로 EU 27개 회원국 중에는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나라가 단 하나도 없게 되었다. 과거 영국 지배를 받은 아일랜드와 몰타는 지금도 영어가 광범위하게 쓰이지만 정작 EU에는 자국 고유어를 공용어로 등록해놓았다. 브렉시트 직후 ‘EU에 영어를 주로 사용하는 국가가 없다’는 점을 들어 영어 대신 프랑스어나 독일어가 새 공용어가 되는 게 맞지 않느냐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하지만 EU 사무국은 부정적 반응을 내보였다. 룩셈부르크 총리를 지낸 장 클로드 융커 당시 EU 집행위원장은 “영어는 EU의 일상적인 실무 언어가 됐다”며 “브렉시트가 그걸 바꾸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24일 덕성여대가 2025학년도부터 불어불문학과와 독어독문학과에 신입생을 배정하지 않기로 했다. 두 학과의 폐지 수순에 돌입한 것이다. 과거 한국에서 프랑스어와 독일어는 비록 영어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제2외국어로서 나름 인기를 누린 게 사실이다. 그러나 2차대전 후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부상하고 1990년대부터는 중국의 성장이 두드러지며 사정이 달라졌다. 제2외국어로 일본어나 중국어를 배우려는 이는 있어도 프랑스어와 독일어 비중은 꾸준히 감소했다. 일각에선 “영어만 잘해도 프랑스어권 및 독일어권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까지 한다. 1990년대 초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말이 유행했다. 이제 세상은 넓어도 배워야 할 외국어는 극소수, 그중에서도 영어뿐인 시대가 도래한 모양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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