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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덕의우리건축톺아보기] 광화문이 동네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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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6-24 23:30:49 수정 : 2024-06-24 23:3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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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촌 장관 개인 의견 들어
광화문 현판 한글화 등 주장
옛 것, 옛 모습대로 복원돼야
복원 기조 흔들기는 안 될 말

광화문이 또 시끄럽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627돌 세종대왕 나신 날’을 하루 앞둔 5월14일 경복궁 수정전 앞에서 열린 ‘세종 이도 탄신 하례연’ 기념사에서 난데없이 광화문 현판에 딴지를 걸고 나섰다. “경복궁 정문의 광화문이 개인적으로 당연히 한글로 쓰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증을 거쳐 옛날 쓰인 현판을 그대로 재현해야 한다는 문화재위원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그대로 됐지만, 오늘 이후 다시 불을 지펴보겠습니다.” 또,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경복궁 복원도 고종이 아닌 세종 시대의 모습으로 복원했으면 좋겠다는 일각의 의견에 “100% 동감한다”고 했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이 자리에는 한글학회장, 국어학회장, 국어문화원연합회장 등 한글 관련 인사들이 모였다고 하니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업적을 추모하는 자리인 만큼 이분들이 듣기 좋게 입에 발린 말을 한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국가유산청을 외청으로 두고 있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공식적인 행사에서 한 말이 어찌 ‘개인적인 의견’에 그칠 수 있을까. 장관의 말이 국가유산청장에게는 1990년부터 시작된 경복궁 복원에 대한 ‘전면 재검토 지시’로 들릴 법하다.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제일 먼저 광화문에 시비를 걸었다. 그들은 1916년부터 광화문 뒤에 있던 흥례문을 헐고 그 자리에 한반도 통치의 총사령부 격인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 시작해 1926년 완공했다. 곧이어 1927년 광화문을 헐어 경복궁 동쪽 궁장 북쪽,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언저리로 옮겼다. 처음에는 철거해 버리려 했지만, 여론이 좋지 않자, 한발 물러섰다. 조선총독부 청사 앞에 있던 광화문이 눈엣가시였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르네상스 건축물 앞에 케케묵은 보잘것없는 광화문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해괴한 논리를 내세웠다. 이로써 일제는 조선의 상징이었던 경복궁을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물인 총독부 청사로 지워 버리고자 한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광화문의 불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이렇게 옮겨진 광화문은 한국전쟁의 전화로 석축만 남긴 채 불타 1966년까지 방치되었다. 당시 가난했던 나라 살림에 여기까지 눈길이 가지 않았다.

이랬던 것이, 1966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광화문은 본래의 위치와는 다른 자리에 원래의 구조와는 다른 구조로 1968년 완공되었다. 타고 남은 석축을 옮기고 그 위에 철근콘크리트 광화문을 지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관해 고 김성진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의 증언이 있다. 조선총독부 청사를 정부 청사로 사용하고 있는데 외국에서 오는 사절들이 서울에 오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이 건물인지라 한결같이 언제 지은 것이냐며 감탄조로 물었다. 서울에 변변한 건물이 없던 시절이니 이 건물이 상대적으로 돋보였다. 이에 대해 대답하는 것이 항시 곤혹스럽고 민망했다. 당시 나라 형편으로는 이 건물을 헐어 버릴 수 없어 고민이 많았는데, 고 최순우 국립중앙박물관장과 상의했더니 광화문을 옮겨 그 앞을 막으면 총독부 건물이 고궁 속에 있는 꼴이 되어 일단 감추어질 수 있다고 조언해 이에 따랐다. 그러니 새로 지은 광화문은 경복궁 정문이 아니라 정부 청사 정문이었다. 여기에 더해 박정희 대통령은 철근콘크리트로 지으라고 지시했다. 당시 문화재관리국에서는 전통 목조로 짓겠다고 보고했으나 서울시가 철근콘크리트를 주장해 대통령이 서울시의 손을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한글 현판을 단 철근콘크리트 광화문이 정부 청사의 정문으로 탄생했다.

1990년 시작된 경복궁 복원 계획에 따라 광화문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기로 함에 따라 철근콘크리트 광화문은 2006년 철거되고 2010년 새로운 광화문이 원래의 자리에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이에 앞서 2005년 당시 문화재청은 관계 전문가의 의견 수렴을 거쳐 복원될 광화문 현판은 고종 2년(1865) 경복궁 중건 당시 글씨를 찾아 달기로 했다. 이때에도 한글 현판을 걸어야 한다는 일부 주장이 한글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있었지만, 옛것은 옛 모습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큰 원칙에 국민 대다수가 공감했다.

경복궁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 1865년 고종 2년 중건할 때까지 270년 이상 폐허로 남아 있었다. 조선의 으뜸 궁궐이었던 만큼 비록 폐허로 남겨 두었지만, 그 터는 신성 공간으로 여겨졌다. 외척의 세도정치로 곤두박질친 왕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자 흥선대원군이 주동이 된 경복궁 중건은 옛 모습에 따른다고 했지만, 예전과는 같을 수 없었다. 정확한 옛 모습을 몰랐기 때문이기도 하고 고종 당시의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규모가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렇게 볼 때 유인촌 장관의 바람대로 세종 때의 모습으로 복원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더욱이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변화하고 진화한 모습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 문화유산 보존의 기본원칙이다. 세종 때의 경복궁이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라면 그 이후 조선조 임금들을 모두 부정하는 꼴이 될 것이다.

유인촌 장관은 광화문 현판에 ‘개인적인 의견’을 내세울 게 아니라 정부 내 외국어 남용에 대해 바른 소리를 해야 한다. 언제인가부터 ‘동사무소’라는 명칭이 ‘주민센터’로 바뀌었고 ‘팀’이란 명칭의 정부 조직이 생겼다. 국어 정책을 담당하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가까스로 제 모습을 찾은 광화문에 시비를 걸 게 아니라 정부 내 한글 경시 풍조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직무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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