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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 딛고 女 기수 첫 그랑프리 우승… 김혜선 기수 “경마는 도박 편견도 깨지길” [마이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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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4-30 06:00:00 수정 : 2025-04-29 20:3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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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로의 여왕’ 김혜선 기수

콤플렉스 작은 키가 장점으로
운동부 꿈꿨지만 키 때문에 좌절
고교시절 다큐 보고 ‘기수’ 알게 돼
기수양성과정 들어가 당당히 합격

영혼의 파트너와 운명적 만남
부산으로 소속 옮긴 뒤 남편 만나
경주마 ‘글로벌히트’와도 첫 호흡
‘꿈의 무대’ 두바이 월드컵 함께 서

조교사로 인생 2모작 준비
기수양성과정 사라져 ‘바늘구멍’
외국인 기수들로 메워 산업 ‘흔들’
여성에겐 더욱 어려워 유학 권장

지난해 12월 한국 경마 102년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 있었다. 한 해의 대미를 장식하는 최고 레이스인 ‘그랑프리(G1)’에서 1922년 국내 경마가 시작된 후 최초로 여성 기수가 우승을 차지한 것. 새 이정표를 세운 주인공은 ‘경주로의 여왕’이라 불리는 김혜선(37) 기수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기수 96명 중 여성은 8명뿐이다. 여성이 남성들 사이에서 난관을 뚫고 성공한 경우를 두고 유리천장을 깼다고 한다. 김혜선은 경마계의 유리천장을 부숴버리고 여성 기수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개척자다. 2013년 프리 선언, 2017년 대상경주 우승, 2021년 300승 달성, 2022년 하루 3개 국제교류경주 석권 등 수많은 여성 기수 최초의 기록 보유자라는 수식어가 잘 말해준다. 올해 4월까지 4939번의 레이스에 나서 437승을 거두는 등 편견과 무시를 딛고 한국 경마의 새 장을 연 김혜선을 경기 과천 서울렛츠런파크와 친정집이 있는 인천 영종도에서 만났다. 그는 인터뷰 내내 담담했지만 경마에 대한 열정만은 대단했다.

 

김혜선 기수가 ‘운명의 단짝’인 글로벌히트를 타고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 김혜선 기수는 글로벌히트와 함께 대상경주 8승을 비롯해 여성 최초 그랑프리 우승을 차지했고 ‘꿈의 무대’로 불리는 두바이 월드컵에도 참가했다.  한국마사회 제공

◆작은 키, 기수로 인도하다

김혜선은 어릴 때부터 몸을 쓰는 것을 좋아했다. “중학교 시절 공부보다는 몸으로 하는 것에 집중했죠. 그래서 운동부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작은 키가 걸림돌이었어요.”

150㎝가 조금 넘는 아이를 받아주는 운동부가 없어서 그는 장래 직업으로 댄서를 떠올렸다. ‘이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혜선 기수가 지난 20일 경기 과천 서울렛츠런파크에서 열린 대상경주에서 우승한 뒤 글로벌히트와 함께 환하게 웃으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국마사회 제공

새로운 길은 난데없이 찾아왔다. 고교 3학년이던 2006년 큰오빠가 보여준 다큐멘터리를 통해 ‘기수’라는 직업을 알게 된 것이다. 기수는 작은 키가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다는 것에 솔깃했다.

더군다나 어릴 때부터 수의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을 만큼 동물을 너무나 좋아했기에 말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그리고 곧바로 당시 마사회가 운영하던 기수양성과정에 서류를 접수했다.

“신체검사와 체력검사 뒤 바로 말을 타고 한 바퀴 가볍게 돌게 하더라고요. 한 번도 타본 적이 없었는데. 아마 균형을 잘 잡는가를 보는 것 같았어요.”

 

첫 기승에 대한 회상이다. 면접을 거친 뒤 한 달간 극기훈련 같은 합숙이 있었고 이를 통해 기수양성과정에 합격해 본격적인 말타기 수업에 들어갔다. 그렇게 2년의 훈련과 최종시험까지 통과한 뒤에야 2009년 기수가 될 수 있었다. “그때 여성 합격자는 저를 포함해 단 두 명이었어요.”

◆첫 승까지 길었던 기다림

기수양성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김혜선에게 첫 승은 쉽게 오지 않았다. “남자 동기들은 졸업하자마자 빠르게 첫 승을 거뒀어요. 하지만 저한텐 좋은 말을 탈 기회가 쉽게 주어지지 않더라고요.”

이유는 역시 여성에 대한 편견이었다. 좋은 말의 경우 남자 기수들에게 돌아가기 일쑤였다. 그에게는 훈련시키는 조교역만 쥐어졌다. 조 배정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기다림 끝에 데뷔 4개월 만인 2009년 10월 첫 우승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의 첫 승을 안겨준 말은 ‘비파’였다. “비파는 까다로운 말이었어요. 다른 기수들은 자꾸 떨어뜨렸는데, 저한테는 순했죠. 자꾸 다른 기수들을 거부해서 출장 정지까지 당하기도 했죠. 그런데 징계가 끝나고 돌아온 비파를 보고 조교사님이 ‘다른 기수는 안 되겠다. 네가 타야겠다’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얻은 기회에 비파와 함께 김 기수는 첫 승을 올렸고 그 경험은 김 기수에게 값진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첫 승의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어요. 그간의 기다림을 보상받는 느낌이었죠.” 다만 그에게 귀한 승리를 함께해 준 비파는 이후 경주마에게는 치명적인 다리 골절 부상 뒤 지금은 하늘나라에 가 있다.

◆과감한 부산행 남편을 만나다

첫 승을 거뒀지만 김 기수에게 좋은 말이나 대상경주 같은 큰 레이스에 나설 기회는 여전히 다가오지 않았다. 피해의식일 수도 있었겠지만 남자들에게 기회가 우선으로 주어지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는 2018년 과감하게 서울을 떠나 부산경남경마로 소속을 옮긴다. 이것이 운명적 인연을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될 줄은 몰랐다. 고향은 전남 무안이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서울에서 살았고 엄격한 집안이라 밤늦게 집 밖에도 잘 못 나가는 생활에 익숙했는데 처음 낯선 곳에 혼자 살게 된 것이다. 이때 김 기수 곁에 8살 연하 후배 남자인 박재이 기수나 나타났다. 서로 말이 통해 같이 붙어 다니다 보니 어느새 정이 들어버렸다. 주변에서도 둘이 사귀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 때쯤 연애를 시작했고 1년 열애 끝에 2020년 1월 결혼에 골인했다. 지금은 다섯 살 아들까지 둔 단란한 가정을 꾸리게 됐다.

 

◆글로벌히트와 운명적 만남

부산에서 만난 또 하나의 운명은 김혜선 기수의 커리어에 결정적 전환점인 영혼의 파트너 ‘글로벌히트’와 만남이었다. 2023년 초, 글로벌히트와 처음 호흡을 맞춘 첫 출전부터 우승을 차지했다. “말이 뛰는 순간, ‘이 말은 다르다’는 걸 느꼈어요”라고 강렬한 첫인상을 떠올렸다. 그는 글로벌히트와 함께 무려 8번의 대상 경주를 우승했다. 가장 최근 대상경주였던 지난 20일 YTN배도 글로벌히트와 합작했다.

특히 잊을 수 없는 순간 중 하나는 2024년 한국 경마 최고의 레이스 그랑프리 정상에 오른 것이었다. “그랑프리 당시 레이스는 유난히 느렸어요. 아무래도 저와 글로벌히트의 궁합을 잘 알고 있어서 다른 기수들이 길을 막는 등 견제가 심했죠. 하지만 글로벌히트는 마지막 코너에서 스스로 길을 뚫고 나왔습니다.” 이 순간 김혜선 기수에게는 글로벌히트와 함께 세상의 편견을 뚫어낸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두바이 월드컵, 세계 무대에 서다

그랑프리 우승을 계기로 2025년 1월 김혜선 기수는 글로벌히트와 함께 한국 여성 기수 최초로 두바이 월드컵 시리즈에 도전했다. 두바이 월드컵은 세계에서 가장 상금이 높은 경마대회 중 하나다. 두바이 월드컵의 우승마와 마주는 수십억대의 상금과 국제적 명성을 얻고, 우승마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 비견되는 종마로서 기대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경마계 ‘꿈의 무대’다.

과거 견학차 방문했던 두바이 월드컵이 열리는 메이단 경마장을 봤을 때 “꿈도 꿀 수 없는 곳”처럼 느껴졌지만, 이번에는 당당히 출전자로 섰다. “이슬람 국가라 여성 기수의 출전을 꺼린다는 말이 있어서 걱정이 많았었죠. 결국 메이단 경마장에 기수로 나서게 된 순간 정말 꿈 같았어요. 세계 최고의 경주마와 기수들이 모이는 무대였으니까요”라며 김 기수는 그때를 생각만 해도 감격스러운 눈치다. 적응이 덜 된 상태에서 나선 예선 1차 시리즈에서 8위에 그쳤지만 2차에서 3위에 오르는 선전을 펼쳤다. 본선 진출은 아쉽게 무산됐지만 “글로벌 히트처럼 한국 토종말도 세계 무대에서 충분히 경쟁할 수 있다는 걸 체감했습니다. 한국말, 한국 기수도 세계에서 통할 수 있어요. 경험과 관리만 뒷받침된다면요”라며 김 기수는 한국 경마의 가능성을 봤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여전히 힘겨운 여성 기수의 현실

좋은 기억을 얘기하다가도 김혜선은 다시 여성 기수의 힘겨운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당장 엄마와 기수를 함께한다는 어려움이 크다. “현재 여성 기수 2명이 육아휴직을 낸 상태인데 돌아올지는 확신할 수 없어요”라고 말한다. 육아와 기수 활동의 양립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김 기수의 경우 출산 전 7개월 출산 후 8개월 등 총 15개월만 쉬고 현업에 복귀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남들과 다른 환경 때문이다. 일단 부부 기수라 남편의 경기와 훈련을 늘 지켜보면서 현장 감각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영종도에 사는 친정엄마가 아들의 육아를 전적으로 맡아준다는 점이 컸다. 다만 아들과는 한두 달에 한 번 정도씩밖에 볼 수 없는 게 가슴 아프다. “아무래도 컨디션 조절 때문에 자주 영종도까지 올라올 수 없지요”라며 안타까워한다. 그래서 서울경마장에서 열리는 대상경주가 너무 반갑다. 대상경주가 있으면 바로 상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건 이런 현실 때문에 김 기수는 후배 여성 기수들에게 결혼과 출산을 신중하게 결정할 것을 조언한다. “경제적 여유가 충분하고 가족의 지원이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경력을 이어가기 어렵습니다.”

 

◆조교사로 제2의 경마인생 준비

지금 절정의 기량을 선보이고 있지만 김혜선 기수는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조교사 자격증을 취득한 것이다. 조교사는 경주마를 관리하고 훈련시키며 기수를 결정하는 일종의 감독과 같은 역할을 한다. 내년 6월 2명의 조교사가 은퇴해 자리가 나기 때문에 그때까지만 기수로 뛰고 조교사로 말과 함께하며 한국 경마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포부다. 물론 기수로 활동하는 남편을 돕고, 아이 육아에도 더 신경 쓸 수 있게 된다는 점도 고려했다.

김혜선 기수는 기수를 꿈꾸는 이들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건넸다. 기수가 되는 길이 굉장히 좁아졌기 때문이다. 과거 마사회가 운영하던 기수양성과정이 사라져 국내에서 기수가 되려면 이제는 마방에 들어가 도제 형식으로 배우는 길이 유일하다. “여성의 경우 마방에서 잘 받아주지 않기에 더 힘들어졌다”고 말한다. 이런 탓인지 한국 경마도 인력난을 외국인 기수로 메우고 있다. 김 기수는 “이러다간 경마 산업 자체가 흔들릴 겁니다”라고 우려했다. 그래서 그는 기수를 꿈꾸는 여성에게 외국 유학을 적극 권장한다. “뉴질랜드 같은 나라에서 경마를 배우고 경험을 쌓으면, 훨씬 탄탄한 실력으로 돌아올 수 있어요”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경마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아직도 경마를 단순 도박으로 여기는 시선이 많아요. 하지만 지금 경마장은 가족 단위 관람객이 많고, 젊은 층도 크게 늘었어요”라면서 “경마는 생명과 함께하는 스포츠입니다. 말과 함께 호흡하고, 함께 달리는 그 순간이야말로 경마의 진짜 매력이죠”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렇게 자신을 이끌어준 말들과의 인연, 넘어야 했던 수많은 장벽, 그리고 꿈을 향해 달리는 용기 속에 묵묵히 달려온 김혜선 기수의 경마에 대한 애정과 도전은 기수가 아닌 조교사로 변신한다고 해도 멈추지 않을 것 같다.


송용준 선임기자 eidy01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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