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처럼 일한다 해 붙여진 마을이름
무일푼으로 정착해 자식 키워낸 터전
“재개발된다 해도 이주비 감당 못해”

한국전쟁 이후 형성된 서울 서대문구 개미마을은 가파른 언덕 위에 빽빽하게 들어선 집과 피난민 모습이 미국 인디언의 집과 닮았다고 ‘인디언촌’이라 불렸다. 그 뒤론 일자리를 찾아 상경한 이농민들이 몰려들었는데,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는 주민들’이라는 의미로 ‘개미마을’이라는 새 이름이 붙었다. 개미마을엔 지금 172명이 살고 있다.
12일 만난 주민들은 마을 이름대로 한평생 개미처럼 일했다. 국가를 위해 희생했지만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한 참전용사 가족, 산업화 시대 뒷골목에서 생계를 이어간 노동자들의 삶이 켜켜이 쌓여 있다. 공기가 좋다고 너스레를 떨고 서울 한복판에 이만큼 자연과 가까운 동네가 없다고 억지를 부려도, 결국 그들은 비싼 서울 집값에 떠밀려 여기 정착한 것이었다.
김재식(83)씨는 25년째 같은 집에서 전세로 살고 있다. 개미마을에서만 수십번 이사를 하다 마지막으로 정착한 이곳에서 4남1녀를 모두 키웠다. 김씨에게 개미마을은 서울에서 이 정도 돈으로 살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였다. 그는 “서울에서 3000만원으로 전세 살 수 있는 곳은 여기밖에 없다”고 푸념했다.
김씨는 젊은 시절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경기 수원 출신인 그는 제대 후 집 짓는 일을 하다 사기를 당해 개미마을에 자리를 잡게 됐다. 인왕산 절로 휴양을 왔다가 우연히 발견한 이곳은 돈 한 푼 없던 김씨에게 ‘마지막 피난처’가 됐다.
김씨는 개미마을에 정착한 후 50살이 될 때까지 목수 일을 했다. 매일 동트기 전 일어나 캄캄해질 때 집에 돌아왔다. 그는 “목수 일을 기반 잡을 때까지 계속했다”며 “거기서 번 돈으로 애들을 다 키웠다”고 회상했다.

김계연(70)씨는 고향 호남에서 상경해 45년 동안 마을에 살고 있다. 그는 “이 집 팔아서 서울에서 살 수 있는 집이 없다”며 재개발이 된다고 해도 돈 없는 사람은 이곳을 떠날 수도 없다고 했다. 철제 현관문 대신 펄럭거리는 비닐을 지나 살펴본 김씨 집안 벽과 천장에는 스티로폼이 스테이플러로 고정되어 있었다. 바닥 장판은 스티로폼을 깔아놓은 것처럼 울퉁불퉁했다.
김씨는 돈을 벌기 위해 개미마을에 정착했다. 일하던 광산이 문을 닫자, 김씨는 무작정 이곳으로 이사 왔다. 서울에 오자마자 식모살이를 시작했다. 서초구 양재역 근처 말죽거리 가정집에서 일하다 한식당으로 일자리를 옮겼다. 식당 일을 하면서도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등허리에 짐을 지고 옮기는 일도 마다치 않았다고 했다.
최기사(68·가명)씨는 열악한 환경에도 마을을 떠나지 않는 이유를 묻자 말을 돌렸다. 그는 인생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낡은 집을 측은하게 바라봤다. 최씨는 그의 목조 집을 가리키며 “집을 비우면 다 망가져서 관리를 해야 한다”고 중얼거렸다. 그는 “우리 아버지가 목수 하면서 다 만들어 놓은 집”이라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내가 손을 볼 줄 모르니까 집이 자꾸 여기저기 망가진다”고 말했다.

젊은 시절 최씨는 6·25 참전용사인 아버지를 보며 특전사가 됐다. 그는 10·26사태, 12·12사태, 부마민주항쟁,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모두 투입됐다. 군 복무를 마친 최씨는 취업난에 시달렸다. ‘살인자’라는 낙인이 따라다녀 이력서를 내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결국 그는 멀리 남태평양 섬 사모아까지 원양어선을 타고 떠나는 험난한 길을 택했다. 현실 도피처럼 시작한 원양어선 생활에서 최씨는 통신케이블을 연결하다 12m 높이에서 떨어지는 큰 사고를 당했다. 부상에서 회복한 그는 돌아와 중장비 운전, 신문 배달, 시내버스 운전기사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최씨는 “우리는 다 그렇게 살았다. 그게 아니면 살아갈 방법이 없지 않나”라며 말을 마쳤다. 그는 여기서 살아온 자신의 세월이 사라질까 봐 차마 마을을 떠날 수 없다고 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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