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애인과 대등한 경쟁
16세에 국내 최연소 퓨처스 우승
AG 동메달… 21세 남자프로 첫승
청각장애인올림픽 ‘데플림픽’ 출전
디펜딩챔프 꺾으며 도쿄서 선전 중
‘침묵의 코트’서 인간승리
공 맞는 소리 안 들려… 시각 집중
장애선수 아닌 실력자로 각인되길
‘자신을 믿고 포기 않으면 길 열려’
조코비치·나달 ‘꾸준함’ 공통 조언
사람들에게 희망·용기 주고파
데플림픽 후 다시 비장애인들과 투어
아직 챌린저지만 메이저대회 진출 꿈
운동선수로서 한계 넘어서 계속 도전
내 성과가 ‘나도 할 수 있다’ 울림되길
눈에 보이는 신체 장애가 있는 사람과 비장애인이 스포츠 경기를 하면 당연히 비장애인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그런데 신체적 장애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청각장애인의 경우 비장애인과 스포츠 경기를 한다면 어떨까. 많은 이들이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경기를 해보면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배드민턴의 경우 청각장애인 올림픽인 데플림픽에 출전해 메달권에 드는 농아인 국가대표도 비장애인 고등학생 선수와 경쟁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라켓에 셔틀콕이 부딪히는 소리에 반응하는 것이 눈으로 보고 반응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이다. 그만큼 소리가 우리의 운동 능력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청각장애가 있다는 것은 운동선수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인 셈이다.
청각장애 3급. 자동차 경적 정도로 큰 소리가 나야 들을 수 있는 수준의 청력으로 태어났지만 7살 때 라켓을 잡은 뒤 지금은 비장애인과 경쟁하며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테니스 선수가 있다. 바로 이덕희(27·세종시청)다. 2013년 불과 열다섯 나이에 남자프로테니스(ATP) 랭킹에 이름을 올렸고, 2014년 7월엔 국제테니스연맹(ITF) 홍콩 국제 퓨처스대회 정상에 서며, 만 16세 1개월의 나이로 한국 선수 최연소 퓨처스 우승 기록을 작성했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선 단식 동메달을 목에 걸었고 2019년 청각장애 선수 최초로 ATP 투어 대회에서 첫 승을 신고하는 등 이덕희는 청각장애 테니스 선수지만 비장애인들 사이에서도 큰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이덕희는 2023년 그리스 세계농아인테니스선수권에서 처음 장애인 대회에 나서 우승하면서 출전권을 획득한 2025 도쿄 데플림픽에 나섰다. 테니스 종목에서 한국 선수 최초의 데플림픽 도전이다. 더군다나 이번 대회 개회식에서 한국 선수단의 기수로 발탁돼 태극기를 들고 선수단을 대표해 당당하게 입장하는 모습도 선보였다. 첫 데플림픽이라 긴장한 탓인 듯 16강전을 앞두고는 독감에 걸렸지만 좋지 않은 컨디션에서도 직전 데플림픽 우승자를 세트스코어 2-0으로 꺾으며 선전을 이어가고 있다. 이덕희를 데플림픽이 한창인 도쿄에서 만나 장애가 아닌 자신과 싸우는 테니스 선수로서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모든 스포츠 경기장은 다양한 소리로 덮여 있다. 테니스만 해도 라켓에 공이 맞는 소리, 공이 코트에 부딪히는 소리, 신발이 미끄러지는 소리, 심판의 판정, 선수들의 숨소리와 고함, 여기에 관중들의 박수와 함성 등 많은 소리가 존재한다. 이 모든 소리가 선수에게는 경기를 풀어나가는 정보가 되지만 이덕희에게는 이 정보가 없다. 그의 코트는 침묵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그의 경기는 일반적인 경기와는 다른 리듬과 템포를 지닌다. 특히 같은 조건의 선수들(청각장애 선수들)과 경기할 때와 비장애인 선수들과 경기할 때의 차이점에 대한 그의 설명은 그의 경기가 얼마나 치밀한 자기 통제를 필요로 하는지 보여준다.
“비장애인 선수들과 경기할 때는 플레이 리듬이나 템포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는 소리를 듣고 미세하게 반응하지만, 저는 오직 시각과 감각에 의존해야 하죠. 특히 포인트 흐름이나 사인 전달 방식이 다른데, 저는 심판의 수신호를 더 면밀히 확인해야 하고, 중요한 순간에는 제 몸의 움직임과 상대의 시선을 더 읽어내야 합니다.”
청각 없이도 그는 비장애인 선수들과 경쟁할 만한 수준의 플레이를 펼쳐 보이며, 침묵 속에서 자신만의 독특하고 강력한 플레이 스타일을 구축했다. 소리가 사라진 환경은 오히려 그의 시각적 집중력과 예측 능력을 극대화하는 훈련장이 된 셈이다.
물론 비장애인도 힘들어하는 운동선수로서 이덕희가 지나온 길은 절대 평탄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테니스를 시작하며 마주했던 수많은 어려움 가운데 그가 가장 힘들었던 때를 묻자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운동을 시작하고 나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쳤던 시기였어요. 경기의 압박감, 청각장애로 인한 소통의 어려움, 그리고 끝없이 요구되는 자기 훈련, 여기에 경제적 부담까지. 모든 것이 한꺼번에 몰려왔을 때였죠. 하지만 저는 그 시기를 버텨냈고, 오히려 그 경험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번아웃까지 이겨낸 그의 단단한 정신력은 단순히 재능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영역으로 보인다. 테니스가 그의 삶을 붙잡아준 동시에, 그는 테니스를 붙잡으며 다시 일어섰다.
그래도 운동선수로서 장애를 가졌다는 것은 때로는 부당한 시선과 마주해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덕희도 구체적인 상황이나 내용은 밝히려 하지 않았지만 차별에 대한 기억만큼은 없을 리 없다.
“차별을 느꼈던 순간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경험을 단순히 불평으로 남기지 않고 더 성장할 수 있는 동기로 삼았습니다. 말을 하거나 논쟁하는 대신 제 플레이와 성과로 증명하며 주변의 시선을 바꿨습니다. 코트 위에서 제가 보여준 결과로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를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결국, 제 삶을 주도하는 것은 저 자신입니다.”
이는 장애를 가진 모든 이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 차별을 장애의 이유가 아닌, 더 높이 도약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는 그의 방식은 감동을 넘어선 존경심을 갖게 한다.
한 발 더 나가 이덕희는 청각장애인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밝혔다.
“사회가 청각장애인을 볼 때 아직 선입견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도와줘야 한다’는 식의 시선이 아니라, 그냥 ‘같은 사람’으로 봐줬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운동선수로서 저를 바라볼 때는 장애보다 제 실력과 노력 자체를 봐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누구보다 땀 흘려 훈련했고 그 결과로 코트에 서 있습니다. 저를 ‘장애를 가진 선수’가 아닌, ‘실력 있는 선수’로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의 바람은 모든 장애인 스포츠 선수들이 원하는 바일 것일지도 모른다.
이번 데플림픽에 사격에서 비장애인 국가대표로 선발돼 화제가 된 김우림과 함께 출전하게 됐다. 두 선수가 모두 비장애인들과 경쟁해 국가대표가 됐다는 공통점이 있기에 큰 공감할 수밖에 없다. 경기장 거리와 일정 탓에 함께 만나지는 못했지만 이덕희는 김우림에게도 응원의 말을 잊지 않았다.
“김우림 선수, 청각장애인으로서 국가대표가 된 모습이 정말 큰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당신의 도전과 노력은 많은 사람에게 힘이 되고 있어요. 앞으로의 경기에서도 당신의 빛을 마음껏 발산하길 바랍니다. 계속 응원하겠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장애를 가지고 운동을 시작하려는 후배들에게도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장애가 있어도 운동은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남과 비교하지 않는 것입니다. 각자의 속도와 방식으로, 하루하루 꾸준히 쌓아 가면 분명 길이 열립니다.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자신을 믿으세요. 그 믿음이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입니다.”
‘꾸준함’이 바로 이덕희의 운동선수로서의 삶을 정의하는 단어처럼 들린다. 이 꾸준함을 이덕희에게 강조한 이들이 바로 세계 최고 테니스 선수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런지 모르겠다. 이덕희에게 이런 조언을 해준 이는 테니스 황제로 지금은 은퇴한 나파엘 나달(스페인)과 아직도 현역으로 뛰고 있으며 메이저 대회 최다승을 노리고 있는 노바크 조코비치(세르비아)였다. 이들을 만나는 기회를 얻었던 이덕희가 두 사람에게 들은 공통된 조언이 바로 “자신을 믿고 꾸준함을 잃지 말라는 말”이었다. 세계 최정상 선수들의 철학도 결국 ‘기본’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그는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나달과 조코비치와 직접 만난 인연이 있지만 정작 이덕희가 자신의 롤모델로 꼽은 선수는 로저 페더러(스위스·은퇴)다.
“저의 롤모델은 로저 페더러입니다. 항상 우아한 플레이와 코트를 지배하는 모습을 닮고 싶습니다. 페더러 선수의 플레이는 단순한 기술을 넘어선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그처럼 오랫동안 최고의 위치에서 영감을 주는 선수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인생 목표를 물었다. 운동선수로서, 그리고 한 사회인으로서 이덕희가 가진 인생의 목표는 그의 도전을 완성하는 최종 지점과 연결되어 있었다.
“운동선수로서는 한계를 넘어 꾸준히 도전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지금의 제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매일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사회인으로서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제가 코트 위에서 보여주는 땀과 성과가 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분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길 바랍니다.”
데플림픽이 끝나면 이덕희는 다시 비장애인들과 겨루며 프로 투어에 나설 계획이다. 아직은 ATP 투어의 하부리그 격인 챌린저 투어에 나서고 있지만 세계랭킹을 끌어올려 메이저 대회까지 진출하고 싶은 욕심도 있다. 이덕희의 도전은 단순한 테니스 경기를 넘어선다. 그의 라켓 스윙 하나하나에는 편견에 맞서는 용기와 인간 승리의 희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침묵의 코트 위에서 가장 큰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며 희망의 라켓을 휘두르고 있는 이덕희의 도전에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힘찬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청각장애 테니스 선수 이덕희는…
●1998년 충북 제천 생 ●청각장애 3급 ●마포고 ●2014년, 한국 선수 역대 최연소 ITF 퓨처스 대회 단식 우승(16세 1개월) ●2016년 메이저 대회 호주오픈 남자부 예선 진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남자 단식 동메달 ●2019년 청각장애 선수 최초 ATP 투어 단식 본선 승리 ●2023년 그리스 세계농아인선수권대회 남자 단식 우승 ●2025 도쿄 데플림픽 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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