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93세를 일기로 별세한 서동권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은 1989∼1992년 안기부를 이끌었다. 서울 남산 기슭에 있던 안기부 청사의 내곡동 이전이 그의 임기 중 결정됐다. 이는 당시 ‘남산 제 모습 찾기’ 사업에 매진하던 서울시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안기부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중정) 시절부터 오랫동안 ‘남산’은 정보 기관과 동의어처럼 쓰였다. 안기부가 내곡동으로 옮기며 남산이 과거의 음험한 이미지에서 벗어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1998년 출범한 김대중(DJ)정부는 안기부 명칭을 국가정보원으로 바꿨다. 그러면서 30년 넘게 쓰인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대신 ‘정보는 국력이다’라는 구호를 새 원훈(院訓)으로 채택했다. 이후 국정원 원훈은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이명박정부), ‘소리 없는 헌신, 오직 대한민국의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박근혜정부),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문재인정부) 등 정권마다 바뀌었다. 현 이재명정부 들어선 DJ정부 때의 ‘정보는 국력이다’로 되돌아갔다.
기성세대에게 낯익은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라는 구호는 미국에서 유래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백악관 참모진의 노고를 치하하며 쓴 ‘익명의 열정’이란 어구를 모티브로 삼았다. 과거 중정 및 안기부가 저지른 각종 비밀 공작과 인권 침해에 비판적인 이들로선 ‘음지’란 표현에 거부감이 들 수 있다. 하지만 국익을 위한 사업조차도 남들 몰래 추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정보 기관 요원들의 숙명 아닌가.
국정원 청사 중앙 현관에 들어서면 ‘이름 없는 별’ 조형물이 있다. 검은색 바탕 벽면에 은빛 별들이 붙어 있다. 임무 수행 도중 목숨을 잃은 중정·안기부·국정원 요원들 숫자를 상징한다. 지난달 28일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원 방문 때 촬영된 사진을 보니 별이 총 21개다. 2024년만 해도 19개였는데 그새 2개가 늘었다. 지난해 9월 네팔에서 국정원 요원 2명이 순직했다는 보도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별들 아래에 새겨진 문구는 우리 가슴 한 구석을 숙연해지게 만든다. ‘소리 없이 별로 남은 그대들의 길을 좇아 조국을 지키는 데 헌신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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