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대표로 AI 카타고와 첫 공식 대결
“AI는 친구이자 스승, 그리고 넘어야 할 존재”
한중일 바둑 삼국지로 불리는 농심신라면배. 나라마다 다섯 명이 나와 이기면 계속 두고, 지면 탈락하는 연승전이다.
2024년 이 대회에서 한국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중국의 선봉 셰얼하오가 혼자 한국과 일본 기사 일곱 명을 연달아 꺾었다. 한국 대표 다섯 가운데 넷은 1승도 거두지 못한 채 탈락했다. 중국은 다섯 명이 그대로 남았고 한국은 단 한 명뿐이었다. 우승하려면 그 혼자 여섯 판을 모두 이겨야 했다.
한국의 운명을 짊어진 마지막 주자는 먼저 부산에서 셰얼하오의 질주를 멈춰 세웠다. 이후 최종 라운드가 열린 중국 상하이로 홀로 향했다. 첫 상대는 일본의 마지막 주자 이야마 유타였다. 이야마를 무너뜨린 뒤 중국의 자오천위, 세계 정상급 기사 커제와 딩하오를 차례로 꺾었다. 닷새째에는 마지막 상대 구쯔하오까지 잡아냈다.
6연승. 혼자 힘으로 뒤집은 우승이었다.
2005년 이창호가 5연승으로 완성한 ‘상하이 대첩’을 19년 만에 같은 도시에서 재현했다.
바둑 수저를 물고 태어나다
아버지는 부산에서 바둑학원을 운영했다. 아마 5단이었고, 어머니도 바둑을 뒀다. 형에게도 소질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프로 기사의 길을 권하지 않았다. 둘째는 달랐다. 재능은 일찍부터 드러났다.
다섯 살에 아버지의 바둑학원에서 처음 돌을 잡았다. 1년 만에 학원 형들을 모두 꺾었고, 2년여 만에 아버지마저 넘어섰다.
그래도 훈련은 끝나지 않았다. 바둑으로 이길 수 없게 되자 아버지는 문제를 들이밀었다. 바둑의 기본인 사활 문제(돌을 살리거나 잡는 수를 찾는 문제)를 반복해서 풀게 했다. 훗날 아들은 에세이에 아버지를 ‘문제 대마왕’이라고 썼다.
“아버지는 내 나이에 도저히 풀 수 없는 사활 문제를 내고 그것을 끝까지 풀어낼 것을 요구하시곤 했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가 세워놓은 높다란 목표들이 때로는 너무나 막막하고 거대해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도망치는 대신 학원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인터넷 바둑을 수없이 두며 실력을 키웠다.
그는 “하루에 10시간씩 바둑 공부를 했다. 습관이 되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돌아봤다.
패한 날이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린 시절 그의 생활 계획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지면 이길 때까지 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산에서는 적수가 없었다. 아이는 주말마다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한국기원 연구생 수업을 받기 위해서였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 가족은 서울로 이사했다. 명문 충암도장에 들어간 지 다섯 달 만에 제1회 영재입단대회를 통과했다.
2012년 7월, 열두 살의 프로 기사 신진서가 탄생했다.
그리고 여섯 달 뒤, 신인은 ‘돌부처’ 이창호를 꺾었다.
이세돌이라는 벽을 넘다
하지만 그에게도 좀처럼 넘지 못하는 이름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가장 존경했고, 꼭 한번 만나고 싶었던 기사 이세돌이었다.
세 번 만났지만 모두 졌다. 그러다 2018년 결승에서 다시 만났다. 국내 대회였지만 신진서에게는 세계 대회 결승이나 다름없었다. 존경하는 기사와의 대결에서 힘없이 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어느 때보다 많은 준비를 했다.
승부는 마지막 5국까지 이어졌다. 2승 2패로 맞선 최종국에서야 신진서는 이세돌이라는 벽을 처음으로 넘었다.
대국이 끝난 뒤에도 두 사람은 바둑판 앞을 떠나지 않았다. 보통 10~20분이면 끝나는 복기가 1시간 넘게 이어졌다.
벽을 넘은 뒤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2020년 1월 한국 랭킹 1위에 오른 뒤 한 번도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79개월 연속 1위. 역대 최장 기록이다. 승패를 점수로 환산해 전 세계 기사의 실력을 매기는 세계 레이팅에서도 맨 위에 그의 이름이 있다.
정상에 서고도 승부욕은 어린 시절 그대로다. 그는 에세이에 이렇게 썼다.
“지면 눈물이 날 정도로 분하고, 이기기 위해 밤을 새워 칼을 간다.”
패배의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신진서는 한 방송에서 특히 이기고 싶었던 상대에게 지면 좋지 않은 감정이 오랫동안 남는다고 털어놨다. 길게는 여섯 달을 갔다.
신공지능(신진서+인공지능)의 탄생
프로 생활 4년째이던 2016년 3월, AI ‘알파고’가 이세돌을 꺾었다. 세계 바둑계의 질서가 뒤집힌 순간이었다. 이후 프로 기사들은 모니터 앞에서 AI가 제시하는 수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신진서는 처음에는 AI를 믿지 않았다. 기사들이 두지 않던 낯선 수가 많았다. 하지만 직접 둘수록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낯설던 그 수들이 결국 정답이었다.
AI를 받아들인 뒤에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AI의 수를 그대로 따라 하기보다 왜 그런 수를 두는지 이해하는 데 집중했다.
그렇게 이해가 쌓이자 실제 대국에서 AI가 추천하는 수와 일치율이 가장 높은 기사가 됐다.
바둑계는 그를 ‘신공지능’이라고 불렀다.
이세돌도 신진서를 두고 “AI에 대한 이해도가 가장 높은 기사”라고 평가했다.
넘어서야 할 마지막 상대, AI
“신이 아니기에 AI도 완벽하지는 않다.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AI를 넘어설 수도 있지 않을까?”
신진서는 AI를 ‘친구이자 스승이자 넘어서야 할 존재’라고 부른다.
AI의 힘을 누구보다 인정하고, 누구보다 많이 쓴다. 그러나 거기 갇히지 않는다. 그에게 AI는 도약의 발판이다. 매일 새로운 숙제를 내밀고, 게을러질 틈을 주지 않는 존재. 세계 1위에 올라서도 긴장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가 늘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넘어서야 할 존재’와 마주한다.
신진서는 17일부터 바둑 AI ‘카타고’와 세 차례 대국한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 10주년을 기념한 무대다. 카타고는 알파고 이후 가장 널리 쓰이는 바둑 AI다. 프로 기사들이 훈련에 쓰고, TV 중계의 승률 그래프도 카타고가 그린다.
10년 전 이세돌은 동등한 조건에서 알파고와 맞붙었다. 이번에는 다르다.
AI의 기력이 크게 발전한 만큼 신진서가 흑 두 점을 먼저 놓고 시작한다.
신진서는 대국 제안을 받기 전까지 석 점을 놓고는 AI에 한 판도 지지 않았지만, 두 점으로는 한 판도 이겨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승부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실전에서는 저 역시 최선을 다할 것이기 때문에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14년 전 7월, 열두 살의 그는 프로 기사가 됐다.
그리고 다시 7월.
이번에는 한국이 아닌, 인간을 대표해 AI와 마주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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