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시작하게 된 농구
체육관도 없는 초등학교서 운동 시작
비행기 한 번 타보려고 선수생활 계속
중학교 때 다리마비로 진학도 늦어져
궂은 일 도맡아 한 프로생활
주로 수비·식스맨 역할 출전시간 적어
최저연봉에 가까웠지만 제 몫은 다해
신한은행 女농구단 코치 맡으며 은퇴
꼴찌팀서 만든 女농구 왕조
4시즌 연속 최하위 우리銀 감독 맡아
‘독사’ 별명 들으며 14년간 8회 챔피언
‘동고동락’ 전주원 코치에 지휘봉 넘겨
“제가 전주원 감독을 위해 비켜줬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전 감독도 이제 감독을 해야 할 나이잖아요.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위성우 아산 우리은행 총감독은 자신의 용퇴를 특별한 희생으로 포장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계속 지휘봉을 잡고 있는 동안에는 14년간 동행한 전주원 코치가 감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위 총감독은 2025∼2026시즌을 끝으로 우리은행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구단이 만류했지만 오래전부터 세워둔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후임은 전 감독이었다. 위 총감독은 코트 전면에서 한 발 물러나 선수단과 코칭스태프를 지원하는 총감독을 맡았다. 물러날 때를 알고 스스로 자리에서 내려오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위 총감독은 달랐다. 코트에서 늘 한 발 더 뛰라고 외쳤던 그가 이제는 한 발 물러나는 법을 선택했다. 떠날 때를 아는 것까지가 리더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위 총감독을 지난 24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2012년 우리은행 지휘봉을 잡은 그는 14시즌 동안 정규리그 340승112패를 기록했다. 부임 전 4시즌 연속 최하위였던 팀을 첫해부터 정상에 올려놓았고 6시즌 연속 통합 우승을 이끌었다. 챔피언결정전 우승도 8차례 차지했다. 하지만 출발점은 화려함과 거리가 멀었다. 국가대표 스타도, 명문 대학의 간판선수도 아니었다.
“제가 똑똑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남보다 뛰어난 것이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 다만 맡은 일은 후회하지 않도록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은 늘 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싶어 이어간 농구
위 총감독은 1971년 부산에서 2남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농구와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초등학교에 농구부조차 없던 시절 한 지도자가 또래보다 키가 컸던 그를 농구부로 이끌었다. 당시에는 농구가 어떤 운동인지조차 몰랐다. 체육관도 없어 흙바닥을 고르고 야외 골대에 공을 던졌다.
중학교에 올라갈 때는 운동을 그만두려 했다. 그를 붙잡은 것은 농구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제주도에서 열리는 소년체전이었다. “비행기를 한 번도 타보지 못했어요. 소년체전만 다녀오고 그만두자고 생각했죠.”
하지만 대회 일정이 중학교 1학년으로 넘어가면서 농구도 계속됐다. 소년체전을 마친 뒤 공부로 돌아가려 했지만 친구들과 벌어진 학습 격차는 컸다. 다른 학생들이 영어 문장을 배우고 있을 때 그는 알파벳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때 운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농구가 자신의 꿈이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단 들어선 길에서 그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다리 마비와 늦어진 1년
중학교 3학년 겨울에는 훈련 도중 갑자기 쓰러졌다. 의식을 되찾았지만 다리에 마비 증세가 왔다. “처음에는 발가락 감각도 없었습니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는데 다행히 큰 이상은 없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회복됐습니다.”
부산중앙고에 진학한 뒤에도 오랫동안 운동하지 못했다. 동기들에 뒤처지면서 동기들이 대학에 진학할 때 그는 유급을 선택해야 했다. “사춘기였으니까 정말 힘들었죠. 친구들은 대학에 가는데 저는 다시 3학년이 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늦어진 1년은 새로운 기회가 되기도 했다. 그가 3학년이 됐을 때 추승균 등 뛰어난 후배들이 입학했다. 예정대로 졸업했다면 함께 뛰지 못했을 선수들이었다.
대학을 선택할 때는 농구보다 은퇴 이후를 먼저 생각했다. 그는 체육교사 자격증을 얻을 수 있는 단국대 체육교육과에 진학했다. 당시 단국대는 강팀이 아니었다. 그러나 선배들이 한국은행과 삼성 등 실업팀에 입단하는 모습을 보면서 목표가 생겼다. “이 학교에서도 열심히 하면 실업팀에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입학 동기 8명 가운데 2학년 때까지 남은 선수는 위 총감독 한 명뿐이었다. 선수가 부족해 공을 잡을 기회가 많았고 자신이 원하는 플레이를 마음껏 해 볼 수 있었다. 졸업을 앞두고 여러 실업팀의 제안을 받은 그는 1995년 현대전자에 입단했다.
◆연봉 3800만원의 식스맨
현대전자 입단 동기에는 이상민 등 이름난 선수들이 있었다. 위 총감독은 주전 경쟁보다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걱정했다. 입단 1년 뒤 상무에 입대했고, 군 복무 중 한국 농구는 프로 시대로 전환됐다.
제대와 함께 안양 SBS에 입단한 그의 첫 프로 연봉은 3800만원이었다. “최저연봉이 3000만원이라 적어도 5000만원은 받을 줄 알았어요. 3800만원이라는 숫자가 지금도 기억납니다.”
프로에서도 그는 스타가 아니었다. 주로 식스맨으로 출전하며 수비와 궂은일을 맡았다. 그러나 적은 출전 시간에도 자신의 역할을 놓치지 않았다. SBS와 대구 동양, 울산 모비스를 거치면서 연봉이 크게 오르지도 않았지만 한 번도 삭감되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9000만원 안팎까지 받았다.
선수 생활의 갈림길에서 신한은행 여자농구단 코치 제안이 왔다. 여자농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지도자보다 체육교사가 되는 길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내의 말에 마음을 바꿨다. “선수 생활을 더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도자 경험이 도움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처음 여자 선수들의 훈련을 봤을 때는 속도와 힘의 차이가 낯설었다. 그러나 후보 선수와 어린 선수들을 직접 가르치면서 보람을 느꼈다. 자신의 지도를 받은 선수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지도자가 적성에 맞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꼴찌 팀에서 시작된 왕조
2012년 우리은행이 감독직을 제안해 왔다. 여러 차례 거절했다. 당시 우리은행은 4시즌 연속 최하위였다. 스타 출신도 아니고 감독 경험도 없는 젊은 코치에게는 부담이 큰 자리였다. “처음에는 장난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당시 우리은행 농구단 사무국장이 저를 데려오지 못하면 사표를 쓰겠다고 할 정도로 강하게 이야기했어요.”
감독직을 수락하면서 위 총감독이 동행을 제안한 사람이 전주원이었다. 안 온다고 할 줄 알았다. 신한은행의 프랜차이즈 스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주원은 새로운 팀에서 지도자로 출발하고 싶다며 위 감독과 동행을 선택했다.
위 감독은 훈련과 승부를 책임졌고 전 코치는 감독과 선수 사이의 균형을 잡았다. 위 감독이 선수단을 지나치게 몰아붙이면 전 코치가 마음을 달랬고, 감독의 뜻이 흐려지지 않도록 선수들에게 설명했다. “제가 선수들을 너무 타이트하게 끌고 간 적이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전 감독이 옆에서 잘 보필해줬어요.”
위 총감독은 부임 직후 체력과 기본기부터 다시 만들었다. 좋은 전술보다 먼저 싸울 수 있는 몸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훈련은 혹독했고 선수들은 그에게 ‘독사’라는 별명을 붙였다. 특히 그가 가장 싫어한 것은 실패가 아니라 대충 하는 태도였다. “저는 스타도 아니었고 좋은 학교를 나온 것도 아닙니다.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것을 몸이 기억하고 있어요.” 그 절박함은 우리은행을 최하위 팀에서 여자농구 최강팀으로 바꾸었다.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다
하지만 위 총감독은 자신의 방식이 영원한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4∼5년 전부터 강한 질책과 혹독한 훈련만으로는 새로운 세대의 선수들을 이끌기 어렵다는 사실을 느꼈다. 베테랑에게 솔선수범을 요구하면 “언제까지 어린 선수처럼 해야 하냐”는 반응이 나왔다. 어린 선수들은 “언니들도 하지 않는데 왜 우리만 해야 하냐”고 생각했다.
훈련 방식과 말투를 바꾸려고 노력했지만 오랫동안 몸에 밴 방식을 완전히 고치기는 어려웠다. “경기에서 이기고 지는 것보다 ‘나는 왜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는가’라는 고민이 더 힘들었습니다. 제 스타일이 시대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어요.”
물러날 시점을 고민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는 2년 전부터 전주원 코치에게 “2년 뒤에는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구단이 재계약을 원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회사에도 말했습니다. 전 감독이 나이가 몇 살인데 언제 감독을 시켜줄 것이냐고요.”
위 총감독은 전 감독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다. 선수로는 여자농구를 대표하는 레전드였지만 코치가 된 뒤에는 앞에 나서지 않고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고 평가한다. “저보다 전 감독을 알아보는 사람이 훨씬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지도자가 된 뒤에는 그림자처럼 일했어요. 항상 낮은 자세를 유지했고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제 아내를 위한 시간
위 총감독의 중요한 선택에는 늘 아내가 있었다. 고교 시절 다리 마비로 재활하던 수영장에서 아내의 언니들과 먼저 알게 됐고, 대학 시절 아내를 만나 7년간 연애한 뒤 결혼했다. 선수와 지도자로 사는 동안 가정은 대부분 아내가 책임졌다. 아이가 밤에 울면 남편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다른 방에서 재웠다. 위 총감독은 운동과 경기에만 몰두했다. “집안일을 거의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아내가 힘들다는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만큼 미안함이 큽니다.”
감독직을 내려놓겠다고 했을 때 아내도 이제 그만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남편의 고단함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그동안 제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았습니다. 이제는 아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해주고 싶어요. 그 은혜를 지금부터 갚아야죠.”
당장은 감독 복귀를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은행 총감독과 대한민국농구협회 강화위원으로 경기장을 찾으며 여자농구 발전을 고민할 계획이다. “제가 여자농구에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감독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도 여자농구 덕분이니까 이제는 발전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죠.”
위성우의 농구 인생은 치밀하게 설계된 성공담과는 거리가 멀다. 무명 선수였던 그는 누구보다 오래 살아남았고, 누구보다 많은 승리를 거둔 감독이 됐다. 그리고 가장 높은 자리에서 다음 사람의 시간을 위해 스스로 내려왔다. “큰 뜻을 세우고 그것을 이뤘다기보다는 흘러가는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다 보니 이 자리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위성우 여자농구 우리은행 총감독은…
●1971년 부산 출생 ● 부산중앙고·단국대-단국대 스포츠과학대학원 석사 ●1995 현대전자 실업농구단 입단 ●1998∼2005년 프로농구 선수(SBS-오리온스-모비스) ●2005∼2012년 여자프로농구 신한은행 코치 ●2012∼2026년 여자프로농구 우리은행 감독 ●2013∼2016년 여자농구 국가대표 감독 ●2018년∼ 대한민국농구협회 이사 ●2026년∼ 여자농구 우리은행 총감독 ●여자프로농구 최다승(340승), 정규리그 최다우승(10회), 챔피언결정전 최다우승(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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