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 노동자 부부의 무너진 삶
부유한 부부가 얽혀들며 균열
서로 다른 세계의 엇갈린 시선
선의·연민조차 뒤틀린 채 표출
‘은사자상’ 들고 간담회 나온 李
“영화의 질문, 관객이 반응… 기뻐”
해고된 사람은 ‘죽은 자’, 해고되지 않은 사람은 ‘산 자’라고 부른다. 이창동 감독 신작 ‘가능한 사랑’(23일 개봉·11월 6일 넷플릭스 공개)에서 한동네 사람들이 서로를 구분하는 방식이다. 베네치아국제영화제 은사자상(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이 영화는 대규모 정리해고와 폭력적 파업 진압이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무너뜨리고, 그 상처가 가족과 공동체로 어떻게 번지는지 보여준다.
21일 서울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창동 감독은 베네치아 은사자상 트로피를 선보이며 “영광스럽다”며 “쉽고 자극적인 영화가 아닌데도 관객들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을 느끼고 반응해주는 것이 보여 정말 기뻤다”고 말했다.
극 중 호석(설경구)은 한때 중공업 기업 정규직 노동자였다. 사모펀드가 회사를 삼키며 구조조정이 단행됐고 호석을 비롯해 노동자 40%가 일자리를 잃었다. 이후 그는 말수가 줄고 화가 많아졌다. 술에 기대고 사람을 피한다. 아내 미옥(전도연)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던 활기찬 청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영화는 여러 차례 플래시백을 통해 두 사람의 젊은 날과 지금의 모습을 교차해 보여준다.
이들의 삶에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조여정)가 들어온다. 노동 문제를 다루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선의를 내세우지만, 예지는 취재 대상과 관찰자 사이에 필요한 거리를 지키지 않는다. 미옥 부부를 식사와 여행에 초대하고, 가장 사적인 순간까지 카메라에 담으려 든다. 자살한 동지의 빈소에서 벌어진 부부의 실랑이, 어린 아들 철이 학교 체육대회에서 홀로 겉도는 모습까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예지의 마음과 그것을 예술의 연료로 삼으려는 탐욕은 좀처럼 분리되지 않는다.
이창동 감독은 기자간담회에서 예지를 통해 “영화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윤리, 태도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는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지 않고, 영화의 재료로만 사용하지 않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평생 해온 질문이고 지금도 답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예지는 호석·미옥과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 그의 남편 상우(조인성)는 막대한 부를 물려받은 금융업 종사자이며, 두 사람 모두 압구정에서 성장하고 미국에서 유학했다. 이 설정은 영화의 또 다른 축인 계급 문제와 연결된다. 미옥은 예지의 우아함을 질투한다. 돈 문제만은 아니다. 예지 곁의 매력적인 상우 역시 질투의 대상이다. 성적 욕망과 열등감, 계급 의식이 뒤엉키며 인물들의 관계는 점점 복잡해진다. 영화 후반부 두 가족이 상우의 호화로운 해변 별장을 찾으며 분위기는 급변한다. 호의와 환대로 보이던 것들이 일순간 불편함으로 다가오고, 눌려 있던 감정들이 터져 나온다.
사랑과 노동, 타인 재현의 윤리까지. 165분의 러닝타임은 풍부한 주제로 가득 차 있다. 이 감독은 “해고 노동자 이야기 같기도 하고, 계급 간 갈등이나 영화 만드는 사람의 윤리에 관한 문제 같기도 하다”며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여러 복잡한 모습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관객들과 이야기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난 뒤 가장 오래 마음에 남는 것은 계급이나 노동이라는 거대한 주제가 아니다. 세파에 떠밀리면서도 무너지지 않으려는 미옥의 얼굴, 분노와 체념을 오가는 호석의 굳은 얼굴이 오래 잔상으로 남는다.
그렇기에 ‘가능한 사랑’은 메시지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영화가 아니다. 인물이 먼저다. 인간의 실제 행동보다 창작자의 비대한 자의식을 앞세우고, 인물을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장기말처럼 쓰는, 그래서 지루해지는 영화를 우리는 얼마나 자주 보고 있나. 이창동은 그 반대 방식을 택했다. 내면을 가진 입체적 인물 네 명을 먼저 만들어놓고, 그들을 서로 부딪치게 한다. 인물들이 욕망하고 질투하고 사랑하는 과정에서 영화는 인간에 대한 통찰을 드러낸다. 베네치아에서 트로피를 거머쥔 이창동을 향해 전도연은 “벌써부터 그의 다음 영화가 궁금해진다”고 했다. ‘가능한 사랑’을 보고 나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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