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겠다’ 자세 필요
“그 상사 얼굴만 떠올라도 숨이 막혀요.” 이제 막 마흔이 된 직장 여성이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했다. 그녀는 얼마 전 새로 부임한 상사 때문에 괴롭다고 했다. “일을 왜 이렇게밖에 못해요?”라며 망신을 주고, 회사 동료들에게 자신에 대해 험담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도 들렸다. 웬만한 일은 참고 견디며 책임감을 갖고 십 년 넘게 업무를 충실히 수행했는데, 이제 막 입사한 상사가 자기를 폄하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인사팀에 문제를 제기해 봐도 뚜렷한 해결책을 얻지 못했다. 회사에서 그녀의 심정을 알아주지 않으니 상처는 더 깊어졌다.
“화가 나겠어요”라고 내가 말했더니 그녀는 “분하고 억울해요”라고 대답했다. “부당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라고 덧붙였다. 그녀의 감정은 단순한 분노나 억울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직장에 쏟아온 시간과 정성이 무시당했다는 모멸감이었다. 존재 가치를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이기도 했다. 그리고 일은 점점 더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녀처럼 노력이 결과로 이어지지 않고 어긋나 버린 상황을 겪은 이들은 이런 복잡한 감정을 모두 끌어안고 진료실을 찾아온다. 철학자 알베르 카뮈라면 이런 상태를 부조리(absurd)라고 불렀을 것이다.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을 일으키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병리적이거나 비정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부조리를 마주한 이들은 대개 다음처럼 대응한다. 첫 번째는 포기다. “이런 회사 다녀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며 현실을 거부하고 회피한다. 두 번째는 순종이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나라고 별수 있나”라고 푸념하며 주어진 상황을 숙명으로 여기고 체념한다.
그런데 카뮈는 다른 선택지를 제안했다. 부조리한 세계를 인정하지만,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것이야말로 의미 있는 태도라고 그는 말한다. 이것을 ‘부조리에 대한 반항(revolt)’이라고 불렀다. 현실을 뒤집는 혁명적 행위라기보다는, 부조리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겠다는 결연함이 바로 반항이다.
신화 속 시지프는 거대한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렸다. 하지만 바위는 정상 근처에서 번번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다. 또다시 밀어 올리고 또다시 굴러 떨어지는 상황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런데도 카뮈는 “그럼에도 시지프는 행복하다”라고 말한다. 바위 굴리기는 형벌이 아니라 삶의 의지를 증명하는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무의미해 보여도 시지프는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았기 때문이다.
열심히 살아도 반드시 보상받는 것은 아니고 정직하게 살아도 억울한 일을 피할 수 없다. 안타깝지만 현실에는 부조리한 것투성이다. 자기를 탓하면 우울해지고 세상을 탓하면 울분이 쌓인다. 이런 감정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배경 음악이 없는 흑백 영화처럼 삶을 관찰해 보자.
당장 퇴사를 결심하기보다는 일상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작은 행동을 우선 실천해보자. 퇴근 후 카페에서 혼자 책을 읽어 본다. 업무와 무관한 글을 써보는 것도 좋겠다. 업무용 이메일과 메신저는 꺼두고 회사 밖 사람들과 포근한 안부를 주고받자. 직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결코 내 인생의 전부일 수 없다는 엄연한 진실을 다시금 떠올려 보는 것이다. 잠들기 전에 뿌듯함을 느꼈던 일 세 가지를 떠올린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보자. “이 상황이 부조리하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끝까지 지켜낼 것이다.”
김병수 정신건강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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