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협력 복원’ 다자주의 불씨 살려야
20년 만에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이펙)가 한국으로 돌아온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열리는 경주 에이펙은 지금 이 시대에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부산에서 에이펙이 개최되었던 2005년은 낙관주의가 지배하던 시대였다. 전 세계가 생산성 향상과 저인플레이션의 혜택에 힘입어 순조로운 성장을 하고 있었고 효율성을 앞세운 공급망 확장이 빠르게 진행되던 골딜록스(Goldilocks) 시절이었다. 반면 작금의 세계는 보호주의, 지정학 그리고 기술패권이 교차하는 격랑의 시기다. 경주는 바로 이런 변화의 한복판에서 에이펙이 자유무역의 보루가 될 수 있을지 시험대에 선다.
이번 에이펙의 슬로건은 “지속 가능한 내일을 만들자: 연결·혁신·번영”이다. 지금 세계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연결성 회복과 혁신을 통한 번영을 내세운 구호다. 그리고 그 내면에는 에이펙의 원래 이념인 개방경제, 자발적 협력 그리고 비차별의 정신을 되살리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에이펙은 원래 정치적 대립을 넘는 역내 실용적 경제협력을 통해 상호 신뢰를 쌓는 것을 목표로 했다.

미·중 전략경쟁은 ‘관세전쟁 2.0’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복귀한 워싱턴에서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와 이보다 더 나간 마가(MAGA) 정신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그는 과거에, 특히 1990∼2015년에 만들어진 세계무역기구(WTO), 에이펙, 파리기후협정 등 다자체제를 “미국의 부담만 키운 실패한 유산”으로 보고 있다. 마가 혁명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보호주의와 파괴적 무역질서의 시대가 도래했다.
에이펙의 이념은 수명을 다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 대한민국은 개방경제의 수혜자이며, 다자주의의 수호자로서, 경주에서 ‘자유무역과 협력의 원칙’을 다시 천명해야 한다. 세계가 블록으로 쪼개질수록, 에이펙의 개방적 포용 구조는 더욱 소중하다. 회원국의 자발적 동조와 호응을 이끌어내는 것이 주최국 한국의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에이펙 본회의와 함께 개최되는 양자정상회담에도 눈이 간다. 에이펙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본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을 것으로 얘기된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한국에 오는 것은 무엇보다 미·중 정상회담과 한·미 정상회담 때문일 것이다. 먼저 미·중 정상회담이 이번 기회에 이루어진다면 이는 향후 양국 간 관세전쟁의 향배를 가늠할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다. 두 나라가 보복관세 완화나 기술통제 조정의 신호를 보낼 수 있을지가 최대 관심사다.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과연 지난 몇 달 동안 진행되어 온 통상협의가 종결될 수 있을지가 중요하다. 현재 진행 중인 투자협정 문제, 조선협력, 관세 및 비관세 협의가 경주에서 어떤 방식으로 타결되느냐가 올해 한·미 통상관계의 대미를 장식할 것이다.
한·중 회담도 관심거리다. 이번에 방한하면 시진핑 중국 주석은 박근혜정부 이후 11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는 것이다. 또한 2017년 문재인 전 대통령의 방중 이후 양국에서 이루어지는 최초의 정상회담이다. 양국 간 교역 회복과 협력 의제 발굴, 첨단산업 기술규제 완화가 집중적으로 논의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일본과 호주와의 양자회담도 매우 중요하다. 일본의 새로운 총리가 국제무대에 처음 나서는 이번 경주 에이펙에서 양국 정상은 경제안보를 포함한 양국 간 미래지향적인 관계 발전을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에게는 호주와의 정상회담도 매우 중요하다. 호주는 핵심광물 공급망 협력을 통하여 경제안보 시대 한국의 가장 중요한 협력대상국으로 떠올랐다. 지난 정부에서 소원했던 양국 관계를 회복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한·멕시코 회담에서는 자유무역협정(FTA) 재개 논의와 북미공급망 연계가 주요 의제가 될 전망이다.
양자회담이 아무리 흥미로워도 에이펙 본연의 임무는 잊지 말자. 2005년 부산 에이펙이 아시아태평양 자유무역지대(FTAAP)라는 미래 비전을 제시했다면, 2025년 경주 에이펙은 개방과 협력의 복원이라는 새로운 선언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경주는 혼돈의 시대 속에서 다자주의의 불씨를 다시 밝히는 성소가 되어야 한다.
김흥종 아산정책연구원 객원선임연구위원·전 대외경제정책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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