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장치에도 환율 불안 불씨 여전
제조업 공동화·일자리 축소 우려도
후속협의·실행서 정교한 전략 짜길
외환 트라우마는 1997년 국가부도 사태를 겪은 우리에게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외환 곳간이 바닥을 드러냈고 주식·외환·부동산 등 자산 시장은 풍비박산이 났다. 기업과 금융회사의 파산이 꼬리를 물었고 숱한 실업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렸다. 수년간 혹독한 구조조정 한파가 몰아친 이후에야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가 끝났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때도 해외자본이 한국을 떠나면서 외환위기의 공포가 덮쳤다. 당시 이명박정부는 300억 달러 규모의 한·미 통화스와프를 체결해 급한 불을 껐다.
지난 4월 이후 반년 넘게 이어진 한·미 관세협의에서도 외환위기의 악몽이 어른거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애초 약속했던 대미 투자 3500억 달러를 ‘현금, 선불’로 대라고 종용하자 이재명 대통령은 “미국 요구를 수용하면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와 같은 사태에 직면할 것”이라고 버텼다. 결국 협상은 관세인하를 조건으로 한국이 연간 최대 200억 달러씩 10년간 2000억 달러를 현금으로 투자하고 미 조선업 부활 프로젝트(마스가)에 1500억 달러를 배정하는 것으로 결론 났다. 정부는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연간 한도를 설정한 게 가장 큰 성과”라고 했다. 합의문에는 외환시장 불안 때 한국이 납입 규모와 시기 조정을 요청할 수 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미국의 ‘선의’에 기대는 이런 안전장치가 효과를 낼지는 의문이다.
정부는 현재 4200억 달러 수준의 외환보유액을 유지하면서 연 투자분을 감당할 수 있다고 한다. 이자와 배당수익으로 충당하고 나머지는 해외 채권발행 등으로 채우겠다는 복안이지만 사정이 간단치 않다. 외환보유액은 환율 급변동을 막기 위해 쌓아둔 비상금이다. 외환 당국은 2022년 시장 개입을 단행해 460억 달러(IMF 추산치)를 쏟아부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외환보유액이 쪼그라들고 환율 대응 여력도 약화할 게 뻔하다.
외풍에 취약한 한국경제는 늘 위기를 달고 산다. 글로벌 경기 침체로 수출이 꺾이고 고유가 흐름이 이어지면 경상수지 악화로 달러 가뭄을 겪기 일쑤다. 외국인의 자본유출 사태까지 겹치면 그야말로 금융·외환시장은 쑥대밭이 된다. 이런 판에 외환 곳간을 축내는 한·미 관세협상이 재앙의 불씨로 전락하지 말란 법이 없다. 나쁜 일은 한꺼번에 몰려오는 법이다.
실물경제 충격도 걱정스럽다. 3500억 달러는 올해 국내 제조업 설비투자 약 1000억 달러(147조원·산업연구원 추정)의 3∼4배에 해당한다. 트럼프는 10월 2차 한·미 정상회담 후 “기업으로부터도 6000억 달러를 받기로 했다”고 한술 더 떴다. 막대한 대미 투자 탓에 국내 산업과 지역경제가 황폐화하고 일자리도 쪼그라들 것이라는 경고는 기우가 아니다. 이 대통령도 그제 7대 그룹 총수를 만나 국내 투자 축소를 걱정했다. 재계는 향후 5년간 최소 800조원 이상의 국내 투자와 대규모 일자리 창출을 약속했다. 이 계획이 이행될지 확실치 않다. 나라 곳간과 기업의 주머니가 화수분은 아니다.
트럼프의 횡포에 가까운 관세협상에서 선방했다는 정부의 자평은 이해 못 할 바 아니다. 관세를 경쟁국에 비해 나쁘지 않은 수준으로 낮춘 건 사실이다. 이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손실을 최소화해야 하는 ‘비자발적 협상’”이라고 했다. 트럼프가 ‘터프 가이’라 했던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도 “공정한 내용이 어디 있나”고 토로했다. 미국은 한 푼도 들이지 않고 제조업 부활의 종잣돈을 마련했고 수익도 절반 이상 챙긴다. 일본과 유럽연합(EU) 등과 비교해도 한국의 대미 투자액은 경제 규모나 국민 1인당 부담액 등에서 과도해 후한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
아직 긴장을 늦출 때가 아니다. 긴 안목으로 경제 여건이 좋을 때마다 ‘환율 방파제’를 높게 쌓는 게 급선무다. 가용 수단을 동원해 외환보유액을 늘리고 통화스와프협정 체결국도 확대해야 한다. 후속 협의·투자실행에서도 정교한 전략과 기민한 대처가 필요하다. 정부는 대미 투자가 헛되지 않도록 사업 타당성을 꼼꼼히 따지고 국내 산업과 일감도 키우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나라 경제를 거덜 내는 외환위기나 산업 공동화는 막아야 한다.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설왕설래] 원잠 vs 핵잠](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5/11/17/128/20251117516932.jpg
)
![[주춘렬 칼럼] 韓·美 관세협상의 그늘](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5/11/17/128/20251117516911.jpg
)
![[기자가만난세상] ‘인간 젠슨 황’의 매력](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5/11/17/128/20251117516885.jpg
)
![[박현모의 한국인 탈무드] 섬길 줄 알아야 신뢰를 얻는다](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5/11/17/128/20251117516838.jpg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