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타기에서 고수, 그리고 다시 명창으로 거듭나 한 시대를 풍미한 실존 인물의 삶을 국립창극단이 창극 ‘이날치傳(전)’으로 국립극장 달오름 무대(11.21∼29)에 되살려냈다. 반상(班常) 구분이 절대적이던 시대를 소리 하나로 뚫고 자신의 길을 개척한 예인(藝人)의 삶이다.
실존 인물을 다뤘지만 작가 윤석미는 파락호에서 권력자로 변모하는 흥선대원군을 비롯해 천주교 전래 등으로 뒤흔들리는 조선의 풍경을 그려 넣으며, 오늘과 통하는 사회적 맥락을 만들어낸다. 극의 중심은 전통 판소리지만, 무대는 남사당 계열 연희의 총집합이다. 상모돌리기, 풍물, 탈춤, 고법, 버나놀이까지 ‘놀이판’이라는 개념 아래 생동하는 무대가 펼쳐진다.
특히 초반 이날치가 줄을 타는 장면은 서울대 국악과 출신 젊은 줄타기 명인 남창동이 그야말로 “잘하면 살판이요, 잘못하면 죽을 판”이라던 줄타기의 참맛을 보여준다.
“여기 있으면 양반도 나를 올려다보지 않나? 이 줄 위에만 있으면 아무도 나를 무시하지 못한단 말일세! 양반들이 못하는 거 잘하는 거! 그게 날치 꿈일세…내 세상은 이 열 자 높이(3m)! 단 한 치 폭의 이 줄 위일세! 이 줄 위가 곧 내 세상이고 내 꿈일세. 내가 이 줄 위에서 세상을 뒤집어 볼 터이니, 두 눈 크게 뜨고 한 번 지켜보시게나!”
극 중반에는 판소리 수궁가 중 ‘범 내려온다’에 맞춰 북청사자가 등장해서 연희의 흥을 한껏 끌어올린다. 이어서 팔도 명창이 맞붙는 ‘통인청 대사습’ 장면은 마치 현대의 랩 배틀을 연상케 할 만큼 역동적이다. 박만순, 김세종, 박유전, 송우룡 등 실존 명창들이 차례로 등장해 ‘수궁가’의 토끼기변, ‘적벽가’의 조자룡 활쏘기, ‘춘향가’의 천자뒤풀이, ‘심청가’의 심봉사 눈뜨는 대목 등 판소리의 정수를 객석에 쏟아붓는다.
다채로운 연희와 명창들 판소리로 외화(外華)를 이뤘다면 내실(內實)을 다잡은건 작가의 선명한 주제 의식이다. 예술의 경지에선 신분·나이보다 실력이 앞서는 것을 보여주며 꽉막힌 조선시대에도 기예로 자유를 추구한 이들의 정신을 줄곧 부각시킨다.
스승보다 열다섯 살이나 많은 몸으로 박유전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이날치는 말한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 양반도 싫고, 벼슬도 싫다. 자유롭게 살고 싶다. 그렇게 살 수 있는 길은 소리뿐이다.”
그 고된 길 끝에 득음에 이른 날치를 향해 대원군은 말한다. “아무리 천출이라도 내가 용을 써도 못하는 걸 해냈으니, 마음으로 대접할 수밖에. 그게 뭐든 남이 못하는 걸 해내는 사람이야말로 인생의 갑이야.”
국립창극단 단원들과 객원 배우들은 연희 중심의 무대를 활력 있게 끌어간다. 개다리 역 최용석, 어릿광대 역 서정금은 재담과 해학, 그리고 찰떡같은 몸동작으로 웃음과 풍자를 쥐락펴락한다. 연희의 중심을 유지하면서도 극의 주제를 놓치지 않는 균형감이 돋보인다.
무대는 관객의 눈과 귀를 호강시키며 오늘의 창극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증명했다. 한가지 아쉬운 대목은 대원군과 중신들 앞에서 앞에서 이날치가 소리를 하는 장면이다. 울리지도 웃기지도 못하면 목을 내놔야하는 이날치가 심청가 중 물에 빠지는 대목을 ‘죽을 판, 살 판’으로 부르는데 흘러나오는 피아노 연주가 극 몰입을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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