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사랑한다는 말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라고 노자는 썼다. 2500년 전 문장이 묘하게 마음에 걸린 건 수용복을 입은 윤세민씨 앞에서 한 말 때문이었다. “당신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를 이해하겠다는 다짐은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지난해 ‘서울서부지법 난동 사태’ 피고인들을 만났다. 대부분 20∼30대였다. 청년들이 왜 법원 담장을 넘었는지 알고 싶었다. 구치소에서 만난 피고인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기에 돌아가도 똑같이 할 것이라고 했다. 정치적 신념을 떠나, 철창 안에서 청춘을 보내는데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마음을 끝내 이해할 수 없었다.
지난달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6년이 됐다. 추모 예배에서 엄마는 여전히 울었다. 외동딸이었던 엄마에게 할머니는 세상 전부였다. 나도 어릴 적 함께 살았던 할머니가 그립다. 하지만 엄마를 잃은 슬픔과, 할머니를 잃은 슬픔이 같을 순 없다. 그날 우리 가족 다섯 명은 각기 다른 크기로 슬퍼했다.
이해란 역지사지의 태도로 상대를 헤아리는 것인데, 나는 엄마가 될 수 없었다. 내가 남이 되는 순간은 오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을 내 것처럼 느낄 수 없고, 타인의 선택을 내 것처럼 받아들일 수 없다. 피고인들의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들이 될 수 없었다. 역지사지는 결국 상상일 뿐이었다.
우리가 이해라 부르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공감과 용서와 동의와 수용 모두를 이해라는 하나의 단어에 담으려 했던 건 아닐까.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다 이해는 공허해졌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해를 미덕으로 여겼다. 서로를 이해해야만 함께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우리는 그 실현 불가능한 이해를 서로에게 강요해왔다.
그러는 사이 사회는 깊게 갈라졌다. 1년간 법정에서 목격한 것도 그랬다. 피고인들은 사회가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분노했다. 대다수 사람은 후회 없다는 그들의 말 앞에서 고개를 저었다. 이해받지 못하는 것은 외면당하는 것이 됐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됐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고 믿었기에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 상대와의 관계를 포기했다.
이해와는 다른 태도가 필요하다. 존중은 어떨까. 이해가 타인을 내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라면 존중은 타인을 타인으로 남겨두는 태도다. 당신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함부로 재단하지 않겠다는 마음이다. 법을 어긴 행위까지 존중하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이해 불가능한 타자를 ‘괴물’로 규정하는 순간 대화는 끝난다.
공상적인 것보다 실질적인 것을 선호하라고도 노자는 썼다. 이해라는 추상적 개념보다 중요한 건 구체적인 몸짓일지 모른다. 이번 취재 중 만난 한 교수는 극우든 ‘개딸’이든 함께 술을 먹고, 산을 타야 한다고 말했다. 이해하겠다는 거창한 약속보다 같은 밥상에 앉아 술잔을 나누는 순간들이 절실한 때다.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설왕설래] AI들의 뒷담화](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6/02/02/128/20260202518112.jpg
)
![[채희창칼럼] 연금은 정부의 쌈짓돈이 아니다](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6/02/02/128/20260202518103.jpg
)
![[기자가만난세상] 이해할 수 없어도 존중할 수 있다](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6/02/02/128/20260202518074.jpg
)
![[기고] 설 민생대책, 지속 가능한 물가정책 이어져야](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6/02/02/128/20260202518012.jpg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