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 비교에 사회측정기 ‘과부하’
초연결 시대 ‘무가치함’과의 사투
우린 쉴 데가 없고 쉴 시간이 없다
최근 읽은 영국 작가 서머싯 몸의 문장이 비수처럼 필자에게 꽂혔다. 서머싯 몸은 ‘인간의 굴레에서’에서 주인공의 큰어머니가 죽자 이렇게 썼다. “얼마나 부질없는 인생이었나.” 큰아버지가 죽었을 때는 신랄하게 말했다. “하찮고 욕심에 가득 찬 사람이었다.” 몸은 실제 부모를 일찍 여의었고 큰집에서 자랐다. 또 파리를 배경으로 한 소설 ‘면도날’에서는 한 남자에 대해 이런 평가를 했다. “다정했던 옛 친구. 그의 인생이 얼마나 헛되고 어리석고 보잘것없었는지를 생각하니 슬픔이 밀려왔다.” 남 일 같지 않다. 그가 펜으로 필자의 삶을 평하면 어떨까를 상상하니, 서늘해졌다.
그래서 한 드라마의 제목이 시선에 들어왔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줄여서 ‘모자무싸’라고 하는 작품 제목, 길고, 철학적이다. 드라마 성공과는 거리가 먼 제목이다. 그래서 되레 궁금했다. 누가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박해영 작가, 몇 년 전에 재밌게 봤던 ‘나의 해방일지’를 쓴 사람이다.
드라마 주인공 황동만은 영화감독을 꿈꾼다. 40대 남자. 그런데 20년째 감독 데뷔를 못했다. 주변에 도를 넘는 독설을 뿜어내는 독설인간으로 드라마 초반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8인회. 영화인 모임이다. 영화감독으로 다 데뷔한 사람들. 이 사람들 모두 황동만이 쏘아대는 독설의 피해자다. 황동만이 모임에서 쉴 새 없이 떠들고 그들의 신작을 깎아내리는 통에 죽을 맛이다. 개봉을 앞두고 성공 여부에 애가 타는데, 고춧가루를 팍팍 뿌리는 멘트를 날리니. 죽이고 싶다.
드라마 시청자는 이 대목에서 황동만의 비사회적인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드라마 속 8인회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의 이런 과장된 행동을 이해하는 게 극 초반의 장치다. 한 사람이 그를 이해한다. 영화사의 여자 PD. 그녀의 대사를 통해 황동만이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그는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자신의 무가치함이 들통날 것 같은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그렇기에 공포 때문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침묵하면 자신의 무가치함이 화제가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선제공격이다. 그러고는 집에 와서 남이 만든 영화를 밤새 보며, 괴로워한다.
황동만의 이상 행동을 심리학은 이렇게 설명한다. ‘사회 비교 이론’(레온 페스팅거)에 따르면, 사람에게는 자기 삶의 점수를 알려주는 내장 센서가 없다. 그래서 옆 사람 얼굴을 본다.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1719년) 속 주인공처럼 무인도에 혼자 있으면 자신의 무가치와 싸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우리는 디포의 세계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와 있다. 지금은 수천, 수만 명과 연결된 세상이다.
황동만의 ‘자존감’은 바닥 상태. 자존감은 ‘사회측정기’(sociometer)라고 한 심리학자(마크 리어리)는 말한다. 자존감은 자신이 공동체에 얼마나 받아들여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감각이다. 수치가 올라가면 환영받고 있다는 뜻이고, 떨어지면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경보다. 자존감 수치가 급락하면, 뇌에 내장된 사회측정기가 위험신호를 우리에게 보내온다.
황동만의 사회측정기는 과부하 상태다. 요란한 경보음을 계속 내고 있다. 황동만의 독설은 경보를 잠재우려는 안간힘이다. 그러나 안간힘이 역효과를 낸다. 사회측정기 수치를 올려보려고 하나, 반대로 내린다. 이 때문에 황동만은 ‘8인회’에서 쫓겨난다. 하지만 이때 8인회의 다른 사람들 역시 또 다른 황동만이다. 황동만에 분노를 표출하는 그들도, 똑같은 불안을 안에 품고 있다. 자신의 무가치함과 계속 싸우고 있으나, 그 싸움에서 승리하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내일, 혹은 모레에는 자신이 황동만 꼴이 되는 게 아닌지 불안해한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는 오래된 현상. 그런데 이게 드라마 제목까지 된 건 이유가 있다. 오래된 인간 마음 문제가 ‘초연결사회’라는 새로운 환경에 올라탔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은 제한된 수의 사람들과 연결되었던 선사시대 산물이다. 그런데 요즘은 인터넷,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수없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 수백, 혹은 수천 명에 맞춰져 있던 우리 뇌 안의 ‘사회측정기’가 수백만 명 앞에서 자기 가치를 평가받는다. 초연결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한다.
예를 들면 소셜미디어(SNS)는 뇌 안의 내장장치인 사회측정기가 몸 밖으로 나온 거다. 나의 무가치함과 잘 싸우고 있나를 보여주는 공개전광판이 SNS다. ‘좋아요’ 숫자가 내 자존감의 현황판이다. 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 한편, 24시간 돌아간다. 이런 적은 없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쉴 데가 없고, 쉴 시간이 없다. 뇌는 과부하 상태. 서머싯 몸이라면, 스마트폰을 손에 쥔 채 ‘좋아요’ 숫자를 들여다보는 우리에 대해 뭐라고 쓸까? 어떻게 비수를 꽂을까.
최준석 과학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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