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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숙의이매진] 이름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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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일을 하는 동료 작가와 커피숍에 갔다. 음료가 나왔을 때 우리의 영어 닉네임이 알파벳 한 글자만 다르고 같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이 같은 영어 닉네임을 쓴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내 영어 닉네임은 줄리언(Julian)이다. 오래전 영국 잉글랜드 동부 이스트앵글리아에 위치한 도시 노리치(Norwich)에 갔을 때 ‘줄리언 오브 노리치(Julian of Norwich) 유적지를 방문했다. 물론 노리치 대성당과 노리치 성이 가장 크고 유명한 곳이지만 세인트 줄리언 교회와 줄리언의 흔적들이 있는 작은 기념관에 오래 머물렀다.

‘줄리언 오브 노리치(1342~1416)’는 중세 시대 노리치에서 은둔하며 흑사병이 창궐하는 현장, 농민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보며 글을 쓴 여성 수도자의 이름이다. 한글로 번역된 ‘사랑의 계시’라는 책은 잉글랜드에서 여성이 영어로 남긴 첫 작품으로서 영문학사에도 기록된 저서로 알고 있다. 그녀는 이 글을 쓸 때 깊은 병중에 있었다고 하고, 다른 여성 필경사들이 그녀의 글을 필사해 전파했다고 한다. 심리적으로 줄리언 오브 노리치에 기대고 싶었는지, 그때부터 내 이름은 줄리언이 되었다. 겨우 커피숍에서나 가볍게 쓰는 닉네임이지만 말이다.

줄리언 이전의 닉네임은 줄리아였다. 작가들이 등장하는 영화 보기를 좋아해서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줄리아란 이름의 레지스탕스로 등장하는 영화 ‘줄리아(1978)’를 보고 짓게 되었다. 줄리아는 어릴 적 친구인 릴리에게 레지스탕스 비밀자금을 가지고 베를린으로 가달라고 도움을 청하는 영화다. 릴리 역은 제인 폰다가 맡았는데 영화 결말은 차마 말할 수가 없다.

몇 년 전에 우연히 내 이름을 고치라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이름 한자는 불용한자이고, 이름이 작가를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아 이 상태로는 잘 풀리지 않으니 한글은 그대로 두고 한자라도 바꾸라는 조언을 했다.

엄마에 의하면 내 이름은 영숙이 아니고 남숙이였다. 그것도 사내 남자, 남을 쓴 남숙이였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나 다음에는 꼭 아들이 태어나야 한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들은 엄마는 한달음에 동사무소로 달려가 남숙이 아닌 영숙으로 출생신고를 해버렸다. 그렇게 나는 영숙이 되었다.

동시대를 사는 영숙들, 불용한자를 써서 인생이 안 풀리는 수많은 영숙들, 글을 쓰는 많은 줄리아들, 은둔하며 명상하는 또 다른 줄리언들, 이름은 다르지만 희망을 볼 수 있었으면 한다.

 

강영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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