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림사지 오층석탑
5부5항 도심 중심에 오층석탑 세워
수직성보다 수평성 강조해 백성들 포용
탑평리 칠층석탑
국토 정중앙에 세워 통일대업 위엄 과시
2단 기단위 석탑 하늘 찌를듯 기세등등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다. 흔히 백제가 멸망한 원인을 나당연합군의 기습으로 본다. 하지만 70년 동안 천문학적인 비용과 노동력이 투입되는 천도(遷都)를 두 번이나 했다는 건 당나라의 침입 이면에 권력을 둘러싼 심한 갈등이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 백제 678년의 역사 속에서 왕위 계승을 둘러싼 다툼은 여러 차례 있었고, 그 과정에서 외척과 일본 왕실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제26대 성왕(聖王·재위 523~554)이 도읍을 사비(現 부여)로 옮긴 결정에도 새로운 터전에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승부수가 깔려 있었다. 그리고 그 계획의 중심에는 불교가 있었다.
불교를 근간으로 백제의 중흥을 꿈꿨던 성왕의 비전은 부여의 도시 골격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무엇보다 부여는 지형적으로 완벽한 요새였다. 금강이 ‘C’자 형태로 도심을 감싸 흐르며 해자(垓子) 역할을 하고, 북쪽의 부소산과 동쪽의 금성산이 도성을 병풍처럼 보호한다. 여기에 금성산을 따라 쌓은 나성(羅城)은 도시의 경계를 설정하고 부여 전체를 성채로 만들었다.
금강-부소산-나성-금성산으로 둘러싸인 도성은 동-서-남-북-중(中)으로 구획되었고, 5개의 영역은 다시 폭 5.3m 내외의 소로(小路)로 세분되었다. 이는 고구려나 신라와는 다른 백제만의 독자적인 행정 체제인 5부 5항을 보여준다. 도성의 중심축은 부소산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왕궁과 현재 궁남지 인근에 있었던 남문을 연결하는 남북 대로(너비 8~9m)였다. 그리고 그 중간에 국찰(國刹)인 정림사(定林寺)를 조성하고 경내 가운데에 오층석탑을 세웠다. 즉, 사비는 정림사를 중심으로 격자로 치밀하게 짜인, 그 자체로 거대한 ‘만다라’였다.
당시 건물들이 대부분 단층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도성 내 수직적인 구심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석탑을 만든 백제의 장인들은 탑의 기단을 낮고 넓게 만들고 다섯 개의 옥개석(지붕돌)을 얇고 길게 빼내어 수평의 리듬을 만들어냈다. 탑의 수직성보다는 수평성을 강조해 오층석탑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정림사가 백성들을 포근하게 품어주는, 호국의 염원이 담긴 곳임을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당시 백제인들의 정신적 지주였음은 660년 7월 백제가 멸망했던 순간까지 잃지 않았다. 당나라 소정방은 오층석탑에 “위대한 당나라가 백제국을 평정하고 세운 비석의 기록(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는 제목과 함께 3000여 글자를 새겼다. 그는 이 행위를 통해 당나라가 백제를 온전히 무너뜨렸음을 후대에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삼국은 신라에 의해 통일됐다. 신라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고구려와 백제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 왜의 침략 속에서도 당나라와의 동맹을 통해 통일의 대업을 달성했다. 문무왕 이후 근 100년간 비교적 안정된 상태를 누리던 통일신라는 제36대 혜공왕이 열 살의 나이로 즉위하면서 정치적 혼란이 시작됐다. 실제, 김양상(제37대 선덕왕)과 김경신(제38대 원성왕)은 혜공왕이 살해된 ‘김지정의 난’을 평정하고 차례로 권력을 잡았다. 심지어 김경신은 당시 귀족들이 왕으로 추대했던 김주원이 폭우로 불어난 알천(閼川·현재 경주시의 북천)을 건너지 못하자, “하늘의 뜻이 나에게 있다”며 왕의 자리를 차지했다.
비록 김경신이 행정과 군사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지만, 정통성은 취약했다. 그는 이 불안한 기반을 타개하기 위해 불교의 힘을 빌렸다. 왕이 된 김경신은 국토의 중앙에 불탑을 세우기 위해 비슷한 속도로 걸었던 두 사람을 국토의 남과 북 끝에서 출발시켰다. 그리고 두 사람이 만난 자리에 탑을 세웠다. 바로 충주의 탑평리 칠층석탑, 일명 ‘중앙탑’이다.
원성왕은 중앙탑을 통해 신라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까지 아우르는 통일신라의 정체성과 이를 다스리는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오가는 남한강 변에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2단의 높은 기단을 쌓아 탑을 올렸다. 높이 14.5m의 중앙탑은 통일신라시대 세워진 석탑 중 가장 높을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형태도 하늘을 찌를 듯 위아래로 길다.
새로운 도성과 통일된 국가의 중심에 탑을 세운 이유는 불탑이 부처의 가르침이나 사리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석가모니가 생존했을 당시 그의 설법을 듣기 위해 제자와 대중이 모인 곳을 ‘승가람마(僧伽藍摩·산스크리트어 Samgharama)’라 불렀는데, 이후 이를 줄인 말이 오늘날 사찰 공간을 뜻하는 ‘가람’이다. 그리고 가람의 한복판에 부처의 사리를 모신 상징물, ‘스투파(Stupa)’를 배치했다. 인도의 둥근 무덤 형태에서 기원한 스투파는 불교가 각지로 퍼지면서 그 수가 많아졌고 동아시아에서 탑의 형태로 발전됐다. 즉, 탑은 가람의 중심인 셈이다.
부처님의 현존을 시각적으로 느끼게 하는 탑은,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우파야(Upaya·방편)’ 중 하나다.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또 다른 우파야는 ‘간이화(簡易化·Simplification)’였다. 중국의 역사 고전 해설가 이중톈(易中天)은 그의 저서 ‘사람을 말하다’에서, 복잡한 것보다 대체로 맞거나 괜찮으면 된다고 생각해 온 중국인들에게 불교를 이해시키기 위한 간이화가 필수적이었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선종’과 ‘정토종’이 생겨났다. 선종은 깨뜨릴 ‘파(破)’자를 내세워 불교의 모호한 관념들을 제거했고, 정토종은 복잡한 경전 공부 대신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짧은 암송(염불)을 통해 누구나 부처가 있는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이를 수 있다는 희망을 전파했다.
최근, 불교는 ‘힙불교(Hip Buddhism)’라는 21세기 우파야를 통해 또 한번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성과는 작년 ‘서울국제불교박람회’에 20만명 이상의 관람객이 몰리며 입증됐다. 흥미로운 점은 관람객 중 상당수가 불교를 믿지 않는 젊은 세대라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한 언론에서는 불교박람회가 MZ세대의 새로운 놀이터가 됐다고 평했다.
불교가 ‘힙’해진 이유를 몇 가지 꼽을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현대인들이 필요로 하는 ‘마음 치유(Mindfulness)’와 ‘균형 잡힌 건강(Wellness)’ 그리고 ‘감각적인 재미(Funness)’를 접목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이보다 젊은 세대들의 마음을 이끈 건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 가만한 ‘포용’이다. 이는 불교가 특정한 양식에 삶을 끼워 맞추지 않고, 어떤 형태의 삶이라도 맞출 수 있는 유연함이 있기에 가능한 자세다.
한국인 절반이 ‘무종교인’인 시대, 종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마음의 위안이다. 거리의 확성기를 타고 쏟아지는 외침이나 불신을 향한 위협 없이, 그저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그리고 굳건히 살아갈 수 있도록 내 마음을 돌아보라는 ‘염화미소(拈華微笑)’가 필요한 시대다. 1400년 전 부여와 충주에 우뚝 서 있던 석탑들이 그러했듯, 힙한 불교 역시 격변하는 세상 속에서 각자의 내면에 단단한 ‘중심’ 하나 세워보라는 조용한 응원을 건네고 있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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