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 숨은 보석’ 오스트리아 와인 매력탐구 ⑨K+K 키른바우어>
미텔부르겐란트는 블라우프랭키쉬 품종 고향
1987년 보르도 품종 블렌딩 다스 판톰 첫선
단일 품종 와인만 생산하던 시장에 큰 충격
직접 재배 오크나무로 오크통까지 손수 제작
포도 과일향과 오크향 조화 아주 뛰어나
블라우프랭키쉬란트(Blaufränkischland). 말 그대로 ‘블라우프랭키쉬의 땅’이란 뜻입니다. 오스트리아 부르겐란트(Burgenland)의 6개 세부 산지 중 미텔부르겐란트(Mittelburgenland)를 이렇게 부릅니다. 그만큼 블라우프랭키쉬를 가장 많이 재배하고 가장 잘 만드는 곳이랍니다. 미텔부르겐란트 그 심장부 도이치크로이츠(Deutschkreutz)에 자리한 와이너리 K+K 키른바우어(Kirnbauer)는 블라우프랭키쉬에 정말 진심입니다. 와이너리 뒤편에 있는 자기 소유의 숲에서 자라는 80~120년 수령 참나무를 직접 골라 베어내고, 그걸로 손수 오크통까지 짜서 와인을 숙성시킬 정도니 대단한 정성입니다. K+K 키른바우어를 ‘블라우프랭키쉬의 마법사’로 부르는 이유랍니다.
◆350년 가문의 역사
키른바우어 가문이 도이치크로이츠에서 포도나무를 가꾸기 시작한 지는 350년이 넘습니다. 지금의 사업체 모습을 갖춘 건 1975년 발터 키른바우어(Walter Kirnbauer)와 부인 이름가르트(Irmgard)가 가업을 이어받으면서부터입니다. 부부는 “타협 없는 와인을 만들겠다”는 각오로 품질을 끌어올리는 데 매달렸고, 1987년 마침내 오스트리아 와인 역사에 남을 사건을 만들어냅니다. 블라우프랭키쉬에 프랑스 보르도 품종을 더한 레드 블렌딩 와인 ‘다스 판톰(Das Phantom)’을 내놓은 겁니다. 이렇게 여러 품종을 섞은 블렌드 와인은 파격 그 자체였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단일 품종 와인이 절대적인 전통이었기 때문입니다. 보르도처럼 여러 포도를 섞어 하나의 와인을 만든다는 개념 자체가 오스트리아 와인 문화에 거의 없었답니다. 하지만 이 도전이 성공하면서 키른바우어는 전국구 프리미엄 생산자 반열에 오릅니다.
◆와이너리 이름 유래
와이너리 이름에 왜 ‘K+K’를 넣었을까요. 다양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황제’와 ‘왕’을 뜻하는 ‘카이절리히 운트 쾨니글리히(Kaiserlich und Königlich)’를 약자 ‘K.u.K.’로 사용했습니다. 제국 소속 기관이나 군대 등의 공식 명칭 앞에 붙이던 표현이 바로 ‘K.u.K.’로, ‘k.u.k. 군대’ ‘k.u.k. 철도’처럼 사용했답니다. 사실 와이너리가 이런 뜻으로 붙인 것은 아니지만 와이너리는 그런 고급스러운 뉘앙스를 은근히 즐기는 눈치입니다. 진짜 의미는 와이너리를 이끄는 마르쿠스 키른바우어(Markus Kirnbauer)와 마를렌 키른바우어(Marlene Kirnbauer) 부부의 성 첫 글자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와인메이커인 남편 마르쿠스의 K, 그리고 와이너리의 공간과 브랜딩을 책임지는 아내 마를렌의 K가 만나 ‘K+K’가 된 겁니다. 또 마르쿠스가 와이너리를 물려받을 때 마을에는 키른바우어 성을 가진 와이너리가 여럿 있다 보니 다른 와이너리와 구분하기 위해 고민 끝에 ‘K+K’를 넣었답니다. 가운데 놓인 ‘+’ 기호에도 뜻이 있습니다. 부부가 똑같은 의견을 갖고 있진 않아도, 늘 대등한 위치에서 함께 와이너리를 꾸려간다는 협업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손님 환대의 의미도 있습니다. ‘두 사람을 더하듯(+), 손님도 더해서 함께한다’는 뜻도 담았다고 와이너리는 설명합니다. 마르쿠스는 클로스터노이부르크(Klosterneuburg) 와인 학교를 졸업한 뒤 한동안 가업 밖에서 경력을 쌓다가, 자신만의 새로운 부티크 아이콘 와인 ‘포에버(Forever)’를 만들겠다는 꿈을 안고 와이너리로 돌아옵니다.
◆판노니아의 태양과 무거운 점토가 빚은 땅
도이치크로이츠는 연중 300일 넘게 해가 뜨는 따뜻하고 건조한 판노니아(Pannonia) 기후대에 자리합니다. 여기에 무겁고 깊은 점토질 토양이 물을 잘 머금고 있어, 포도가 완벽하게 익을 때까지 필요한 수분을 꾸준히 공급해 줍니다. 이런 토양은 미텔부르겐란트의 간판 품종 블라우프랭키쉬에 단단한 구조감과 특유의 스파이시한 향을 입혀줍니다. 와이너리는 도이치크로이츠 지붕들을 내려다보는 살짝 높은 언덕에 자리해, 밭 전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습니다.
약 45ha 포도밭은 골드베르크(Goldberg), 카르트(Kart), 알테스 바인게비르게(Altes Weingebirge), 바이세스 크로이츠(Weisses Kreuz) 등 여러 필지에 흩어져 있는데, 저마다 조금씩 다른 토양 색깔을 지녔습니다. 재배 품종은 레드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블라우프랭키쉬를 중심으로 츠바이겔트(Zweigelt), 메를로, 카베르네 소비뇽, 시라를 기르고, 화이트로는 샤르도네와 소비뇽 블랑, 리슬링 등을 소량 재배합니다. 특히 대표작 ‘기르머(Girmer)’는 50년이 넘은 고목에서만 포도를 얻습니다.
◆유기농법과 양조 철학
K+K 키른바우어의 슬로건은 ‘포도 한 알을 위한 왕국(Ein Königreich für eine Traube)’입니다. 밭 관리부터 손으로 하나하나 포도알을 선별하는 과정까지, 모든 손길이 이 한 문장에 담겨 있습니다. 재생에너지를 활용하고 밭에 물을 인위적으로 대지 않는 건식 농법을 지키며, 트랙터 사용도 최소화해 토양을 보호합니다. 제초제와 살충제도 쓰지 않습니다.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2015년 무렵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먼저 지속가능성 인증을 받은 와이너리 중 하나가 됐고, 지금은 전 포도밭이 공식 유기농 인증까지 받았습니다.
양조 철학의 핵심은 ‘와인과 오크의 균형’입니다. 과실 본연의 맛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섬세한 오크 뉘앙스를 입히는 게 목표입니다. 지하 셀러에는 1000개가 넘는 바리크 오크통이 자리하고 있고, 와인은 여기서 최대 3년까지 숙성됩니다. 이렇게 완성된 와인들은 입안을 부드럽게 감싸는 실키하고 크리미한 질감과, 힘 있으면서도 정교한 탄닌감을 동시에 지녔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직접 재배하는 오크 나무와 후디니
K+K 키른바우어의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후디니 츠바이겔트. 언체인드(HOUDINI – Zweigelt. Unchained.)’라는 와인에 담겨 있습니다. 이름은 전설적인 탈출 마술사 해리 후디니(Harry Houdini)에서 따왔습니다. 원래 이 와인은 ‘기르머 리저브(Girmer Reserve)’라는 이름으로 팔렸는데, 오스트리아 와인법이 밭 이름(라겐) 표기를 까다롭게 규정하자 마르쿠스는 아예 규제의 ‘사슬’에 얽매이지 않는 독자적인 브랜드를 만들기로 합니다. ‘기존의 관습과 규제에서 벗어나 츠바이겔트 품종의 잠재력을 자유롭게 펼치겠다’는 뜻에서, 후디니가 쇠사슬을 끊어내듯 탄생한 와인 이름입니다.
이 와인의 진짜 매력은 오크통에 있습니다. 와이너리 뒤편에는 가문이 대대로 지켜온 사유림 기르머 숲이 있는데, 마르쿠스는 이 숲에서 자라는 80~120년 수령 판노니아 토착 참나무를 직접 골라 벌목합니다. 이렇게 얻은 목재를 수년간 건조시킨 뒤 와이너리 안에서 바리크 오크통으로 직접 제작합니다. 포도뿐 아니라 오크통까지 완전히 자기 땅에서 완성하는 셈입니다. 후디니는 가장 오래된 수령의 츠바이겔트만 사용하며,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발효한 뒤 이 기르머 숲 오크통에서 24개월간 장기 숙성됩니다. 자기 땅의 참나무라 그런지 바닐라나 초콜릿 향처럼 과한 오크 풍미를 입히는 대신, 은은하고 섬세한 스파이스 뉘앙스를 더합니다. 잘 익은 블랙체리와 아마레나 체리 향에 검은 홍차와 자스민 꽃잎 같은 이색적인 아로마가 어우러지고, 벨벳처럼 부드러운 탄닌과 산뜻한 산미가 특징입니다.
◆다스 판톰(Das Phantom)
K+K 키른바우어 와인은 ‘와인 스피어 아시아(Wine Sphere Asia)’를 통해 초이스 트레이딩이 국내에 수입합니다.
1987년 처음 세상에 나온 다스 판톰은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프리미엄 퀴베(Cuvée) 레드 중 하나로 와인 역사를 새로 쓴 K+K 키른바우어의 플래그십 와인입니다. 블라우프랭키쉬를 중심으로 메를로, 카베르네 소비뇽, 카베르네 프랑, 시라를 더한 블렌딩입니다. 야생 베리 칵테일과 잘 익은 체리, 카시스의 풍성한 과실향이 먼저 훅 들어옵니다. 로즈마리와 타임, 시원한 민트 같은 허브 뉘앙스가 뒤따르고, 블랙 올리브와 시더우드 향이 층층이 겹쳐집니다. 오크 숙성에서 우러난 버지니아 담뱃잎과 부드러운 가죽, 다크 초콜릿, 에스프레소 향까지 더해져 향만으로도 꽤 복합적입니다. 입에 머금으면 정교하고 주시한 블랙 와일드베리와 체리 풍미가 중심을 잡아줍니다. 부르겐란트를 감싸는 따뜻한 판노니아 평원의 기운을 닮은 스파이시함이 은은하게 감돌고, 산뜻한 산미와 부드럽고 유연한 타닌이 균형을 잘 이룹니다. 마지막엔 짭조름한 미네랄 느낌과 은은한 민트 향이 길고 우아한 여운으로 남습니다.
구조감이 단단하고 산미가 살아 있어 육류나 진한 풍미의 요리와 특히 잘 어울립니다. 양갈비 스테이크나 소고기 등심 구이는 물론, 사슴이나 멧돼지 같은 고급 사냥고기 요리와도 훌륭한 조합을 보여줍니다. 오랜 시간 푹 끓여낸 램 스튜나 라구 파스타처럼 육즙이 진한 요리, 트러플을 곁들인 크리미한 리조토와도 잘 맞습니다. 카카오 함량 높은 쌉싸름한 다크 초콜릿과 함께 마시면, 와인 속 오크 향과 초콜릿의 쌉쌀함이 만나 풍미가 한층 더 깊어집니다.
깊고 두꺼운 점토질 토양에서 자란 포도를 자연 친화적인 유기농법으로 재배하며, 수확량을 철저히 제한하고 전량 손으로 수확합니다.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발효한 뒤 225리터 바리크에서 말로락틱 발효를 거치고, 같은 오크통에서 18개월간 숙성됩니다. 출시 후 여러 해가 지나도 숙성 잠재력이 이어진다는 평가입니다.
▶다스 판톰, 이름에 담긴 이야기
유령이란 뜻의 다스 판톰(Das Phantom) 이름에는 흥미로운 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1987년 첫 빈티지를 시음하던 날, 발터와 가족들은 잔에 담긴 와인 앞에서 말을 잃었습니다. 색도 향도 맛도 너무 낯설고 어두워서,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누군가의 입에서 “이건 마치 유령 같다”는 말이 튀어나왔고, 그대로 와인 이름이 됐습니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검은색 라벨도 그날 함께 정해졌습니다.
공교롭게도 당시 법규와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우연이 있었습니다. 1987년 오스트리아 와인법에서는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가 아직 ‘품질 와인 품종’으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레이블에 이 품종명을 아예 표기할 수 없었습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정확히 무슨 포도로 만들었는지 알 길이 없는, 그야말로 정체불명의 와인이었던 셈입니다. 이 정체불명이라는 특징이 판톰이라는 이름과 묘하게 겹치면서, 이름의 의미가 한층 더 그럴듯해졌습니다. <‘알프스 숨은 보석’ 오스트리아 와인 매력탐구 ⑩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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